서울의 마지막 간이역
서울의 마지막 간이역
2016.05.06 17:00 by 최현빈

“이번 역은 화랑대, 화랑대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지하철 6호선이 지나는 화랑대역. 

하지만 이곳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역이 숨어 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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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노원구에 위치한 육군사관학교. 대한민국 국군 장교의 산실인 이 학교 정문 앞에 오늘 우리가 찾을 ‘히든 스테이션’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6호선 화랑대역과 동명의 기차역. 하지만 역의 문은 굳게 닫혀 있고, 승강장에는 꽃과 나무가 무성합니다. 그동안 봤던 서울의 다른 역들 과는 너무 다른 풍경인데요. 이곳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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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사관학교 앞에 숨겨진 화랑대역, 역의 정문은 굳게 잠겨 있다.

서울의 마지막 간이역

지금은 멈춰 있지만 화랑대역에도 열차가 다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2010년 12월까지만 해도 서울과 춘천을 오가는 경춘선 열차가 하루에 다섯 차례 이곳에 머물렀지요. 당시 춘천, 청평 쪽으로 여가 활동을 떠나던 대학생들은 이 역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서울 최후의 간이역이기도 한 화랑대역은 춘천으로 향하기 전 들리는 서울의 마지막 역이었습니다.

서울을 빠져나간 기차는 강변을 따라 춘천까지 달렸습니다. 차창 밖으로 금빛으로 빛나는 강물을 바라보는 순간은 그때의 대학생들만이 누릴 수 있었던 특권이자 낭만이었죠. 지금은 상봉역에서 출발하는 경춘선 전철이 터널을 통해 빠르게 달리지만 잠깐잠깐 밖에 볼 수 없는 강의 풍경을 보고 있자면 조금 느리게 도착하긴 해도 그 시절이 그리워집니다.

왠지 쓸쓸하게 느껴지는 열차 신호기.

화랑대역은 1939년 일제 강점기에 경춘철도주식회사가 일제의 군수, 산업자재를 공급하기 위해 지었습니다. 처음 영업을 시작한 이름은 ‘태릉 정류소’. 화랑대라는 역명으로 불리기 시작한 건 광복 후 철도가 국유화되기 시작했던 1958년부터입니다. ‘화랑대’는 인근에 위치한 육군사관학교의 별칭입니다. 사실 경춘선 열차는 여가 활동을 떠나는 대학생들만 이용하던 것이 아닙니다. 육군사관학교의 생도들과 이곳으로 배치 받은 병사들도 화랑대역 개찰구를 통과했습니다. 대학생들에겐 낭만의 열차이지만 이들에게는 그리움의 열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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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문이 살짝 열려 있어 역 내부를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잠겨 있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는 뜻이지만)

“역과 기차를 보면 언제나 집이 있던 부산 생각이 났어. 열차를 타고 부산역에서 내리면 예쁜 여학생이 날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이야.”

오래 전 육군사관학교에서 생도 생활을 겪은 한 군인은 화랑대역을 오갈 때가 자신의 ‘화양연화(花樣年華‧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였다고 추억합니다. 강원도로 훈련을 떠나거나, 집이 있는 부산으로 갈 때면 언제나 이곳을 거쳐갔던 그에겐, 화랑대란 이름이 지하철 입구보단, 오래된 간이 역사로 먼저 다가옵니다. 육군사관학교는 역을 사이에 놓고 서울여자대학교와 마주보고 있습니다. 군인은 예전에는 이성과 항상 일정 거리 이상을 이격해 걸어야만 했다며 추억을 되새깁니다.

화랑대역 스탬프, 지금은 1호선 광운대역에서 받을 수 있다.

역사가 문화재가 되다

2010년 12월 21일부로 더 이상 열차가 정차하지 않는 화랑대역. 비록 선로는 걷혔지만 화랑대 역사는 1939년 목조로 지은 그 형태가 지금까지 매우 잘 보존되어 있어 등록문화재 <제30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비록 운행하지 않는 역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에게 옛 기억을 전해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화랑대역의 지붕에는 조금 특별한 부분이 있습니다. 다른 간이역들은 대칭으로 십(十)자형의 박공지붕을 얹은 것에 비해 이곳의 지붕은 삼각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한쪽이 길게 늘어져 보이는 화랑대역만의 작은 개성입니다.

오른쪽이 길게 늘어진 화랑대역의 지붕.

화랑대역을 지나던 옛 경춘선 선로는 바로 앞 화랑대사거리에서 끊겨 있습니다. 열차가 지날 때면 땡땡 울리던 철도 건널목의 정겨운 소리도 이젠 서울역 주변의 몇몇 곳을 제외하고는 추억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건널목 너머의 선로는 지금은 주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저녁이 되면 산책을 하거나 만남의 장이 되곤 합니다. 서울시 노원구에서 실시하고 있는 폐철길 공원화 사업으로 사람들이 옛 철길에 발길을 들이자 그 주변으로 카페나 레스토랑들이 들어선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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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람들의 산책로가 된 경춘선 철길

 

 

마지막 역의 마지막 역장

비록 간이역이었지만 화랑대역은 어엿한 정식 역장이 있던 역입니다. 지금은 망우역에서 근무하고 있는 권재희(63) 씨는 화랑대역에서 1년 3개월간 역장으로 지내며 역의 마지막을 바라봤던 사람입니다. 권 역장님을 만나 옛 역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화랑대역의 마지막 역장을 지낸 권재희 씨. 지금은 망우역에서 근무 중이다.

하루에 열차가 다섯 번밖에 서지 않는 작은 역. 그것이 오히려 특별하게 느껴지는 도심 속의 작은 역을 위해 권 역장님은 새로운 시도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지루하게 열차를 기다리는 손님들을 위해 역 로비에 간이 다방을 설치하고, 가을 낙엽들을 역 앞에 모아 태우며 시 낭송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권 역장의 이러한 시도에 처음에는 반대하는 직원들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이들이 자진해서 기념엽서를 만들기도 했다고 합니다. 화랑대역이 수명을 다했던 2010년의 겨울까지 단골손님들을 비롯한 지역 주민들, 철도 동호회 사람들도 화랑대역을 찾아와 특별한 추억을 쌓을 수 있었던 건 이러한 역장님의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낙엽 태우기 행사. 역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시낭송을 하며 낙엽을 태웠다.(사진: 권재희)

화랑대역을 이용하던 손님은 약 스무 명. 권 역장님은 적은 사람이 이용한 만큼 손님들 하나하나가 기억에 크게 남는다고 합니다. 역에서 크고 작은 행사를 열 때면 제일 먼저 나서 도와주던 어린 학생은 청년이 되어 이성 친구를 데려와 소개했고, 취재차 방문했던 한 기자는 간이역의 매력에 빠져 매주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열차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 동안 마주쳤지만 지금도 소식을 주고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래된 역이 맺어준 친구일까요.

“역장으로 근무할 때는 철길 관리를 정말 철저히 했어요. 지금의 침목이 우거진 철길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왜 이리 아픈지…”

벌써 5년 전의 일이지만, 옛 역을 회상하는 역장님의 눈시울은 붉어졌습니다. 자신의 마음속에만 존재하고 있는 줄 알았던 작은 역에 누군가 관심을 가져 주었다는 것이 너무 기쁘다며 역장님은 저희에게 감사의 말을 연신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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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쑥 자라난 꽃과 나무가 역의 지금을 말해줍니다.

조용한 화랑대역에 산책을 나온 엄마와 딸의 모습이 보입니다. 아이는 텅 빈 철길이 신기한 듯 선로 위를 살금살금 걷고, 엄마는 딸에게 이곳이 예전엔 기차가 다니던 역이라고 알려줍니다. 더 이상 화랑대역에선 서울을 빠져나가는 옛 경춘선 열차를 볼 수 없지만,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이곳에 새롭게 새겨지고 있습니다.

 

 

 

 내 맘대로 포토 스팟

화랑대역 인근에는 육군사관학교가 있기 때문에 사진을 찍을 때 군사시설물이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특히 SNS에 올릴 목적이라면 더욱 신경을 쓰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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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춘천 방향을 각각 가리키고 있는 승강장의 낡은 표지판. 함께 온 누군가가 있다면 이곳을 배경으로 두고 서로의 등을 기대거나, 나란히 손을 잡고 서서 사진을 찍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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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온 사람이라면 철길을 걸어가는 뒷모습을 찍어 보세요. 고전적인 사진이지만 쓸쓸한 느낌을 살리기에는 최고입니다.

 

/사진: Joseph

필자소개
최현빈

파란 하늘과 양지바른 골목을 좋아하는 더퍼스트 ‘에디터 ROBIN’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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