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숙인 헐크와 맨발의 청춘 캄
고개숙인 헐크와 맨발의 청춘 캄
고개숙인 헐크와 맨발의 청춘 캄
2016.05.27 10:54 by 김상욱

2014년 라오 브라더스의 훈련장… 그늘 한 점 없는 뜨거운 뙤약볕 아래, 땅이 군데군데 팬 운동장에서 선수들보다 더욱 ‘파이팅’을 외치며 선수들을 훈련시키던 이만수 감독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졌습니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제대로 된 훈련을 시킬 수 있단 말인가.’

라오스에 야구장이 있을 리가 없었고, 그나마 넒은 동네 운동장이 몇 개 있었지만 잔디가 움푹 팬 낙후된 장소임에도 대관료는 비쌌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찾지 않는 가장 더운 시간대, 상대적으로 비용이 저렴한 오후 2시부터 두 시간동안 빌렸던 것입니다. 햇볕이 가장 뜨거운 시간에 라오 브라더스와 이만수 감독은 더 뜨겁게 연습을 했습니다.

오후 2시의 뙤약볕은 내가 너인지, 네가 나인지 모르게 만들었다.
저는 김민식이 아니에요. 제 이름은 ‘끔’이랍니다.

야구라는 스포츠는 훈련을 하든, 경기를 하든 넓고 탁 트인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매일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땡볕에서 연습을 할 수도 없습니다. 결국 이만수 감독은 야구장 건립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 후원기업을 찾아 뛰어다녔습니다. 그리고 이 절박한 사정은 현재까지도 진행형입니다.

제가 지난 1월 한국-라오스 친선 경기를 보러 라오스를 방문했을 때도, 이만수 감독은 3일 먼저 들어와 라오스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는 등 고군분투 중이었습니다.

“어제 라오스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셨다고요?”

“네. 라오스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 야구협회 설립에 대해 이야기 중입니다. 라오 브라더스가 국제대회에 참가하려면 라오스 야구협회 창설이 필수거든요. 사회주의 국가 특성상 라오스에선 무슨 일이든 빠르게 진행되기가 쉽지 않아요. 여기 태권도 협회가 설립 되는 데만 10년이 걸렸대요. 야구협회 설립은 추진한 지 1년이 조금 넘었지만, 윤곽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해요. 상당히 빠른 편이죠. 물론 갈 길이 아직 멀었고, 여러모로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에요.”

“절실한 도움이라니요?”

“야구장 건립 말입니다. 부지는 라오스 정부에서 무상으로 제공해 주기로 약속했어요. 문제는 ‘건립비용’입니다. 지금 예상으로는 대략 2억 원 정도 비용이 발생할 것 같아요. 물론 이것도 예상입니다. 더 들어갈 수도 있죠. 이 비용은 순전히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에요. 큰 돈입니다. 정말 십시일반 후원이 필요해요.”

먼 훗날 라오스 야구박물관에 전시 될 정부 관계자 미팅 사진

고개 숙인 헐크

이만수 감독은 테이블에 놓인 시원한 물을 한 번에 다 들이키며 대화를 이어나갔습니다.

“솔직히 야구하면서 대우만 받았지 누구에게 굽실거려본 적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즘 참 많이 굽혔습니다. 라오 브라더스가 저를 굽히고 또 고개 숙이게 만들었습니다. 라오 브라더스를 알리기 위해 기자들에게 직접 메일도 보내고 스마트폰 메신저로 한 명 한 명 모두 연락을 했습니다. 제가 46년 동안 야구하면서 아는 기자들이, 또 주변에 지인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 많은 이들에게 한명씩 모두 연락하면 눈, 손가락이 너무 아프지만 보람은 있습니다. 어떤 기자는 제가 직접 라오 브라더스 관련 홍보 문자를 보내니까 ‘진짜 이만수 감독님 맞나요?’ 합디다. 제가 현역 감독 시절엔 이런 홍보를 직접 할 거라고 저도, 기자들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만수 감독은 ‘야구센터’라 불리는 작은 공간에서 훈련하는 라오 브라더스 선수들을 잠시 바라보더니 다시 대화를 이어 나갔습니다.

“‘몸이라도 풀 수 있는 저기 있는 저 작은 훈련공간마저 없었으면 어떡할 뻔 했나’ 하면서 정말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좁지만 그래도 선수들이 너무 열심히 훈련해요. 저 선수들에게 야구가 어떤 의미일까요? 야구가 선수 한 명 한 명의 인생을 바꿔 놓을 수도 있는 의미가 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이렇게 천천히 한 바퀴 뛰면 30초도 안 걸리는 훈련 공간

한국인들에게 야구란 대중들의 인기를 뜨겁게 모으고 있는 전 국민의 스포츠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라오스에서 야구란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낯선 스포츠’입니다. 저는 문득 선수들의 사연이 궁금해졌습니다.

사실 아까부터 훈련장 주변을 자꾸 맨발로 다니는 청년이 눈에 들어왔거든요. ‘뭐지? 맨발… 라오스의 웰빙 런닝족인가?’ 저는 맨발의 청년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맨발의 청춘’, 캄
언제나 혼자였던 아이

라오 브라더스 야구단에는 늘 맨발로 다니는 22살 청년 ‘캄’이라는 선수가 있습니다.

제가 처음 ‘맨발의 캄’을 봤을 때는 ‘운동할 때 지압을 위해서 저러나 보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훈련장을 벗어나 마주친 캄은 여전히 맨발이었습니다. 아무리 라오스가 가난한 나라이지만 맨발로 다닐 정도의 최빈국은 아니었기에 놀라서 물었습니다.

“캄!! 왜 맨발로 다녀? 너는 신발이 없어?”

캄은 별 거 아니란 듯이 “신발 있는데 맨발이 편해서 이렇게 다녀요”라고 말했습니다. 캄의 그 대답을 믿었던 제가 순진했던 거죠.

신발은 거들뿐. 내 발은 자유롭다.

우리나라에서도 지압 효과가 있다며 일부러 맨발로 걷기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봤는데, 캄도 그런 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진짜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맨발이 더 편했던 이유는 발 크기보다 신발이 작았기 때문입니다. 짙은 눈썹에 늘 우수에 찬 미소를 짓는 캄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아왔던 것일까요?

오늘 여기 바닥 청소는 내 발바닥이 다 하리다

캄이 두 살 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마저 그 충격으로 자살을 하셨다고 합니다. 부모님에 대해 아무 것도 기억을 하지 못하는 캄은 친척집에서 자라게 됐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20살이 넘은 청년이 됐습니다. 그리고 친척 집을 떠나 비엔티안에서 영어 학원의 잡일을 도우는 일을 시작했지요. 그러나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친척집에서 눈칫밥을 먹고 자란 어린 시절 경험은 캄으로 하여금 ‘나를 지켜주는 사람은 나일뿐’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캄은 학원 동료들과 어울리지 않고 늘 혼자 밥을 먹었습니다. 어느 날 캄의 이런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학원장이 그 이유를 물었는데, 캄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혼자 먹으면 많이 먹을 수 있어서요.”

결국 학원장은 캄을 해고했고, 세상에 기댈 곳 없던 캄은 다시 철저하게 혼자가 됐습니다. ‘역시 세상에서 믿을 사람은 없어.’ ‘나는 내 스스로 지켜야 해.’ 그렇게 상처뿐인 세상을 또 배워갔습니다. 세상에 기댈 곳 없이 방황하던 캄은 우연히 라오 브라더스 야구단의 선수 모집 공고를 보게 됩니다. ‘야구? 이게 뭐지, 밥은 주나?’ 캄은 야구가 뭔지 몰랐지만 무작정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라오 브라더스 입단 테스트 홍보 현수막
저기...이 검은 장갑은 뭐죠?

글러브라는 것을 주기에 손에 꼈고, 공을 주기에 던졌습니다. 야구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한 두 시간이 지난 후 귀해서 쉽게 접하지 못하는 시원한 물병을 하나 주길래 캄은 냉큼 받았습니다. 잠시 후 합격자 발표가 났고, 전원 합격이었기에 당연히 캄도 그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캄은 아껴 마시던 물병을 가방에 넣으려고 지퍼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캄의 가방에 걸레들이 잔뜩 들어 있는 걸 교민 제인내씨가 보게 됐습니다.

“캄! 왜 걸레를 이렇게 많이 가방에 넣고 다니니?”

“걸레 아니에요. 제 옷인데요.”

제인내씨는 그만 울컥했습니다. 고작 20살짜리 캄이 살아 온 세월의 무게가 너무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이죠. 곧이어 캄이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제인내씨는 캄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캄, 너 우리 회사에서 물건 지키는 경비 일 좀 할래? 물론 월급도 줄게.”

“아니요. 저는 월급 필요 없어요. 그냥 먹여주고 재워주시면서 학교에 보내주시면 안되나요?”

제인내씨의 마음은 캄의 대답에 하염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결국 캄은 제인내씨 회사에서 경비 일도 하고 숙식을 하면서 라오 브라더스 선수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인내 씨에게 물었습니다.

“캄이 누군지도 정확히 모르셨으면서 뭘 믿고 캄에게 회사 경비 일을 제안하셨습니까?”

초창기 라오 브라더스 입단 테스트 모습

제인내 씨는 잠시 숨을 고른 후 대답했습니다.

“선수 선발 테스트 도중에 캄과 얘기 하면서 사연을 알게 됐는데, 문득 제 청년 시절이 생각나더라고요. 저도 젊었을 때 단점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그 당시 제 상급자가 절 믿어줬어요. 그 덕분에 제가 엇나가지 않고 여기까지 제대로 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면이었지만 저 아이를 한 번 믿어보자고 결심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도 좀 감정적이었죠. 하하. 회사의 중요 물품을 지키는 경비 일이면 정말 중요한 역할이잖아요. 그런데 그때는 캄을 믿어줘야 한다는 확신이 이상하게 자꾸 들었어요. 그렇게 하루하루 캄과 지내다 보니 제가 그 나이였을 때보다 지금의 캄이 훨씬 더 잘하더라고요. 모든 면에서요.”

그렇게 제인내씨 회사에서 먹고 자며 경비 일을 하게 된 캄. 동시에 라오 브라더스에도 입단 한 캄은 정말 많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단체 운동인 야구를 하면서 동료들과 어울리는 방법과 재미를 알게 됐고, 이제는 절대로 혼자서 밥을 먹지 않습니다. 동료 선수들과 밥을 먹으며 더 많이 먹으려는 욕심도 부리지 않습니다. 처음과 달리 너무 많이 밝아졌다고 합니다.

야구공의 실밥 갯수는 총 108개이다

야구, 너와 나의 연결고리

캄은 라오 브라더스 선수 중에서 가장 끝까지 남아 연습을 하는 친구입니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나 좀 봐 달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매번 웃통을 벗고 힘차게 공을 던집니다. 하루 종일 캄을 유심히 관찰하던 저는 제인내씨에게 물었습니다.

“캄이 정말 열심히 하네요. 포지션이 뭐죠?”

“그…그냥… 강타자요….”

“….”

자네, 근육 단련 좀 해 볼 생각 없는가?
미안해 캄. 카메라에 잡히기에 넌 너무 빨랐어

비록 아직은 특출나게 뛰어난 실력이 아니어서 딱히 포지션이 없지만, 그럼에도 캄은 야구를 하는 것이 너무 즐겁다고 합니다. 야구를 통해 동료가 생겼고 오랜 세월동안 마음 한 켠에 굳게 자리 잡고 있었던 ‘오직 나 먼저’라는 강박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글러브를 내려놓은 맨발의 캄은 작은 훈련공간을 뛰기 시작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훈련공간은 천천히 한 바퀴를 뛰는데 30초도 안 걸립니다. 캄은 웃통을 벗은 채 20바퀴 이상을 쉬지 않고 전속력으로 뛰었습니다. 숨을 헐떡이면서 바닥에 엎드린 캄이 고개를 들자 저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나 좀 봐달라’는 듯한 눈빛이었죠. 그런 캄에게 물었습니다.

“캄, 야구가 좋아?”

“너무 좋죠. 그리고 야구를 함께하는 동생들도 너무 좋아요. 동생들과 영원히 함께 야구를 했으면 좋겠어요.”

나 이제 동생들이랑 밥 같이 먹는답니다

캄의 사연을 알게 된 후부터 하루 종일 캄에게 시선이 향했습니다. 훈련 중에도 캄은 늘 뒤에서 묵묵히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서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우수에 찬 표정이 아빠미소, 아니 ‘형님미소’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캄은 이제 ‘라오 브라더스’라는 큰 배를 탔습니다. 나만 알고 세상을 불신했던 캄이 야구를 통해 표류하던 인생의 항로를 바로잡는 소중한 역사가 시작된 것이죠.

  

'헐크' 이만수의 꿈 “야구로 받은 사랑, 야구로 갚겠다!” 대한민국 프로야구의 역사와 함께 했던 이만수 前감독(SK 와이번스)이 야구 불모지 라오스에서 펼치는 유소년 육성기. 라오스 판 ‘엘 시스테마’의 기적을 만들어가는 현장을 만나본다.

이 콘텐츠는 헐크 파운데이션(Hulk Foundation)의 스토리펀딩 프로젝트 내용을 재가공한 것입니다. 라오 브라더스와 헐크 파운데이션 후원에 관심이 있는 독자분들께서는 재단 페이스북(facebook.com/leemansoo22)으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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