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길따라 느릿느릿' 경전선 단선철로 여행
'외길따라 느릿느릿' 경전선 단선철로 여행
2016.08.31 15:30 by 최현빈

빠름이 미덕인 세상입니다. 사람들을 싣고 달리는 철도도 예외는 아닙니다. 모바일을 통해 어디서나 간단히 표를 끊을 수 있고, 서울에서 부산까지도 세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시대죠. 

그런데 이런 흐름과 반대로 가고 있는 노선도 있습니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경전선입니다. 총 길이 300.6km. 광주광역시 광주송정역에서 경상남도 밀양의 삼랑진역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다섯 시간. 고속철도를 타면 서울과 부산을 왕복하고도 남는 시간입니다. 그나마 이것도 최근에 일부 구간이 개량되면서 단축된 시간이지요.

오랜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빠른 것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답답할 만큼 느리지만, 천천히 여행을 즐기고 싶은 이들에게 경전선 코스는 최고의 코스 중 하나입니다. 비슷한 느낌의 도시를 벗어나 여전히 오래된 모습들을 간직하고 있는 지역들이 많기 때문이지요. 산길을 둘러 느리게 달리는 만큼 아름다운 우리나라의 자연 풍경을 바라보기엔 이만한 열차가 또 없습니다. 덕분에 경전선은 내일로 여행을 하려는 학생들에겐 필수 코스로 추천되곤 합니다.

고불고불 굽이친 경전선 광주-순천 구간의 모습(사진: DAUM 지도)

경상도와 전라도를 이어주는 유일한 철도 노선이지만 도로 교통의 발달 등의 이유로 경전선의 이용객은 지속해서 감소했습니다. 특히 지난 7월 복선화 공사가 모두 완료된 순천-삼랑진까지의 구간과 달리 광주-순천 구간은 오래된 단선 선로를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이제는 폐철길 공원에서나 볼 수 있는 한 줄로 된 선로에 여전히 열차가 다니고 있는 것이지요.

광주송정역으로 들어오는 무궁화호 열차. 4량의 열차가 짧게 느껴집니다.

봄에는 벚꽃이,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아름답게 핀 모습을 볼 수 있었던 하동역, 북천역 등은 경전선 동쪽의 공사가 완료되면서 역사 속으로 몸을 감추었습니다. 많은 선로가 개량될수록 더 많은 간이역이 사라지겠지요. 여전히 오래된 역들을 품고 있는 경전선. 가장 느린 열차가 지난다는 광주에서 순천까지의 구간을 천천히 지나보았습니다. 사라지기 전에 보고 싶어서요.

남평역에서

광주를 떠나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전라남도 나주의 남평역입니다. 역에 들어서자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의 구절들이 새겨진 시비가 가장 먼저 반겨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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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곽재구 <사평역에서> 中

추운 겨울밤의 대합실 풍경을 서글프게 표현한 이 작품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역인 사평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이 영감을 얻은 곳은 바로 이곳 남평역이라고 합니다. 단순히 이름이 비슷한 것 아니냐고요? 때마침 이곳에서 나고 자란 신천운(66)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시의 실제 배경은 과거에 존재했던 남광주역이라고 해요. 지금은 사라져버린 역인데 남평역이 그 역의 모습과 가장 닮았기에 그런 이야기가 나왔죠.”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만큼 남평역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한때는 통학하는 학생들과 직장인들로 북적이던 역이었지만, 2012년 역이 영업을 중단할 즈음에는 이용객이 하루에 다섯 명도 채 안되었다고 합니다. 신씨는 “나도 통학할 때 역을 많이 이용하곤 했는데 텅 빈 대합실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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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폐역을 공원화하는 사업과 관련한 이야기가 계속 오갔지만, 지자체의 장이 바뀌는 등 외부 사정으로 인해 남평역은 여전히 쓸쓸한 모습입니다. 신씨는 “다른 지역의 유명해진 간이역들을 보면 부럽다”고 말하며 “언젠가는 이곳 남평역도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받는 나들이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랐습니다.

조용한 간이역

남평역을 떠나 능주역으로 향했습니다. 화순군 능주면에 위치한 이곳은 남평역과는 달리 열차도 정차하고 역무원도 근무하고 있는 간이역입니다. 이곳에 머무는 열차는 하루 8회, 무더운 날씨에 기다리는 이 하나 없는 고요한 승강장이 더욱 한산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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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선의 선로가 보성군에 접어들기 시작하면 빨간 벽돌로 지어진 명봉역이 가장 먼저 맞이해줍니다. 능주역과 마찬가지로 열차를 기다리는 손님들은 없었지만, 대신 이곳엔 해바라기들이 가득합니다. 역무원도 없는 무배치 간이역에서 명예역장을 비롯해 작은 역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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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도 더운가 봅니다.

추억의 간이역

전남 보성 일대는 내일로 여행객들의 성지로 꼽히는 곳입니다. 제일 유명한 곳은 보성역이지만 전 바로 옆 득량역으로 가 보았습니다.  다른 한산한 분위기의 간이역들과 다르게 이곳에는 옛 추억의 거리를 즐기는 여행객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역 내부의 오래된 시설물들과 함께 역전 거리에도 옛 전파상, 슈퍼마켓 등이 들어선 게 마치 70~80년대로 시간 여행을 온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많으니 역도 덩달아 활기찬 느낌입니다. 전남 여수에서 이곳을 찾은 강예빈(22)씨는 “녹차밭을 보기 위해 보성으로 가다가 이곳에 추억의 거리가 있다고 해서 사진을 찍기 위해 들렀다”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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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분위기를 재미있게 살린 득량역

다른 역들에 비해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간이역, 이곳을 홀로 지키고 있는 심정욱(45) 부역장님은 역을 찾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오니 저희가 거부할 게 있나요. 그저 환영할 뿐이죠.”

올해 1월부터 이곳에 부임하기 시작한 심 역장님은 “SNS를 보고 사람들이 작은 간이역에 계속 찾아오는 것에 놀랐다”고 말합니다. 추억의 거리는 2011년부터 시작된 ‘득량역 전통문화공간 조성사업’을 통해 꾸며졌습니다. 내일로 여행이 생긴 이래 여행객의 수가 늘어난 보성군이 득량역과 함께 시작한 문화사업이지요. 작년과 올해 5월에는 코스프레 축제도 열려 작은 역에 300명이나 되는 여행객들이 몰리기도 했습니다.

심정욱 부역장님. 득량역에는 역장이 따로 없습니다.

득량역에는 하루 평균 80~100명, 여름철에는 150명 정도의 손님이 방문한다고 합니다. 다른 간이역들과 비교하면 정말 많은 숫자이지요. 역장님은 사람들이 조용한 마을을 찾아와 주는 것에 반가워하면서도 사람들의 여행문화에 대해서는 일침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기는 건 좋은데, 다음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아쉽다”면서요. 가끔 빌린 소품들을 제대로 반납하지 않고 가거나, 쓰레기를 아무 곳에나 버리는 방문객들은 혼자서 역을 관리해야 하는 역무원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입니다.

아름답게 꾸며진 간이역이 앞으로도 그대로의 모습을 지킬 수 있을까요. 역장님은 “다양한 요인들이 있지만, 지자체와의 협력이 계속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코스프레 축제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던 것도 보성군에서 지역의 대표적인 축제인 다향제를 개최하면서 함께 소개해준 것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일제 수탈의 역사를 안고 있는 원창역은 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경전선은 이후 벌교군을 걸쳐 순천으로 들어갑니다. 광주에서 순천까지 비교적 긴 거리가 아님에도 하루가 훌쩍 지났습니다. 그 어떤 열차보다 천천히 달리는 경전선. 빠른 도시 생활에 지쳤을 때 이곳을 천천히 여행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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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민동오

필자소개
최현빈

파란 하늘과 양지바른 골목을 좋아하는 더퍼스트 ‘에디터 ROBIN’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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