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와 맥주, 그리고 굴라쉬
체코와 맥주, 그리고 굴라쉬
2016.10.05 17:34 by 이민희

“한 모금만 마셔봐도 맥주의 질을 알 테지만, 쭉 마셔서 확실히 맛을 아는 게 좋다.”

맥주를 제대로 음미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체코의 격언이다. 체코에는 맥주와 관련된 속담이 유난히 많다. 국민 건강 관리 차원에서 체코의 각 지역 정부가 맥줏값을 조정하긴 했지만, 한때는 물보다 맥주가 더 쌌고 지금까지도 일부 지방에서는 맥주가 물보다 싸다. (가격을 올리는 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체코는 “맥줏값을 올리는 나라는 망한다”는 속담도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체코맥주(출처: www.ranker.com)

 

체코 사람들이 맥주를 마시는 방법

미하엘리 리 주한 체코문화원 원장에 따르면, 체코에서 점심에 먹는 맥주는 술이 아니다. 상당수의 직업 인구들이 점심 식사 전후로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업무로 복귀한다. 그 이상의 맥주를 업무 시간 동안 허락하는 업장도 있다. 맥주가 업무 생산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유리공장이나 제철소처럼 열을 많이 사용하는 근무 환경에서는 고용주가 일하는 동안 제약 없이 마실 수 있도록 무한대로(그리고 무료로) 맥주를 제공한다. 체코에서 맥주는 물과 다르지 않다. 정말로 물처럼 마신다. 한 통계에선 체코의 1인당 연간 맥주 소비량이 365리터에 달한다고 말한다. 이제는 소비량이 점차 줄어드는 추세라 평균적으로 161리터를 마신다는 통계도 있지만, 절반 이상으로 줄었다 해도 여전히 적은 양이 아니다. 주변의 맥주 강국 독일, 벨기에, 아일랜드보다 높은 수치다.

체코는 993년부터 맥주를 주조했다는 역사가 있다. 수도원 내 수도승들이 남긴 기록에 그렇게 남아 있는데, 지금도 프라하 시내의 일부 수도원은 펍과 레스토랑을 겸하며 전통적인 방식으로 맥주를 세상과 나누고 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기록의 역사 이전부터 맥주는 있었다고 본다. 6세기 슬라브 민족의 이동이 있기 전부터 오늘날의 체코를 구성하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등지에서 맥주의 원료인 홉이 자라왔던 덕분에 진작부터 맥주를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12세기에는 국경 바깥으로 수출까지 했다. 체코의 맥주 수출은 오스트리아 제국 시대, 산업의 발전과 함께 더욱 활발해진다. 1842년 라거의 원형으로 통하는 필스너 우르켈이 출시됐고, 19세기 후반부터는 매일 아침 물류 전용 기차를 타고 비엔나로 이동했다. 이어서 프랑스와 미국에 차례로 소개됐다.

훌륭한 맥주를 탐하는 사람들의 열망이란 다 마찬가지라서 늦게나마 한국에서도 체코 맥주를 즐길 수 있게 됐다. 체코의 대표 맥주 필스너 우르켈은 소위 ‘불페너의 맥주’로 통한다. 야구 커뮤니티로 시작했지만, 세상의 오만 가지 이슈와 개인의 관심사를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커뮤니티 ‘불펜’에서 맥주 관련 화두가 등장할 때마다 호평이 쏠리는 맥주라는 것이다.

불펜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필스너 우르켈은 이런저런 맥주 덕후들이 수입 맥주 뉴비들에게 입문용으로 무리 없이 권하는 대표적인 맥주다. 고유의 쌉쌀한 맛이 있어 그냥 홀짝 마시기에도 좋지만, 진짜 강점은 근본적으로 맑은 맥주이면서 맥주 자체의 맛이 과하게 무겁지 않다는 데에 있다. 맛의 개성이 있으되 곁들여 먹는 음식을 방해하지 않을 만큼만 풍미를 유지하는 것이다.

체코의 대표 맥주 필스너 우르켈

 

체코 맥주의 동반자, 굴라쉬

미하엘라 리 원장에 따르면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한식을 경험할 때면 상에 가득 깔리는 반찬에 압도된다. 한 접시씩 차례로 등장하는 코스 식단에 익숙해서 그렇다. 체코 사람들이 이 코스에 맥주를 빼먹을 리 없다. 다만 순서가 좀 다르다. 체코 사람들의 저녁 식사를 살펴보면, 펍에 도착하면 일단 맥주를 한 잔 들이켠다. 맥주를 다 먹을 때쯤이면 소고기로 만든 스튜 호베지 굴라쉬(Hovězí guláš)가 나온다. 미국식으로 덤플링(Dumpling), 체코식으로 크네들릭(Knedlík)이라 불리는, 베이컨이 깃든 빵을 곁들여 굴라쉬의 양념에 찍어 먹기도 한다. 이런 식단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고기와 맥주가 주를 이루기 때문에 대장암 발병률이 꽤 높다. 야채는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체코 사람들은 “돼지를 통과한 야채(=도축 전까지 돼지가 먹고 자란 야채)를 먹으니까 괜찮다”며 웃는다고 미하엘라 리 원장은 설명한다.

미국 출신으로 프라하에 거주하면서 체코의 문화를 콘텐츠로 생산하는 작가 피오나 게이즈는 몇 해 전 굴라쉬를 만드는 체코의 셰프들을 찾아다니면서 긴 글을 썼다. 그녀가 만난 체코 모라비아 출신의 셰프 이트카 플레즈는 굴라쉬를 두고 “절대로 실망을 안겨주는 일이 없는 요리”라 설명했다. 재료비 부담도 크지 않고 조리법도 간단해 누구나 만족스럽게 즐길 수 있는 요리라는 뜻이다.

사실 굴라쉬는 엄청난 요리가 아니다. 음식점마다 가격이 다르긴 하지만 꽤 고급스러운 식당을 찾는다 해도 2만원 전후면 먹을 수 있는 대중음식이다. 한편 체코의 유명한 레스토랑 체인 ‘로컬’의 셰프 마레크 야누흐는 “굴라쉬는 좋은 재료를 써서 사랑으로 만드는 것이 본질”이라 했다. 체코인이라면 굴라쉬에 관한 노하우나 철학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미하엘라 리 원장은 굴라쉬를 “오래 끓여야 맛있고, 하루 지난 뒤에 먹으면 더 맛있는 음식”이라 말한다. 이처럼 굴라쉬는 가정과 식당에서 두루 즐길 수 있는 체코의 대표 메뉴이자 만드는 사람의 개성과 의미가 살아 있는 영혼의 음식이다.

미하엘라 리 주한 체코문화원 원장의 호베지 굴라쉬(출처: 원파인디너)

그러나 기원을 살펴보면 굴라쉬는 예나 지금이나 헝가리에서 더 유명한 음식이다. 말부터가 그렇다. 굴라쉬의 어원은 헝가리어로 '목동'이다. 소를 키우고 관리하면서, 때때로 나약해진 소를 잡는 도축업자로 분했던 9세기의 목동들이 식사 시간을 아끼기 위해 야외에서 끓여 먹던 음식이다. 성가실 게 없었다. 계속해서 끓이기만 하면 됐고, 수분이 증발하면 물을 붓고 더 끓였다. 서민의 음식으로 시작한 굴라쉬는 1000년에 걸쳐 상류층의 식탁으로 이동했고, 19세기 식민지 오스트리아는 비엔나 스타일의 굴라쉬를 대중화했다. 독립의 기초를 다지는 과정에서 헝가리는 자국의 언어와 함께 굴라쉬를 지켜야 할 자국의 대표 문화로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 굴라쉬는 오스트리아는 물론 독일 북부, 루마니아 북부, 슬로베니아, 체코와 슬로바키아까지 이동했다. 국가마다 맛과 스타일은 조금씩 다르지만 핵심 조리법과 활용법은 비슷하다. 야채를 으깨 졸인 소스에 고기를 오래 끓인다. 그리고 맥주를 곁들이기에 좋은 음식이다.

 

발 달린 음식

먼 옛날부터 체코의 맥주는 밖으로 이동했고 체코의 굴라쉬는 밖에서 들여왔다. 문득 음식과 문화의 이동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되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따르는 것 같다.

한식의 세계화라는 익숙한 슬로건이 말해주는 것처럼 국가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인위적인 정책의 산물일 수도 있고, 19세기 오스트리아 제국이 헝가리의 굴라쉬를 취하고 체코 맥주를 수입했던 것처럼 상대적으로 강력한 집단의 흡수로 이루어진 결과일 수도 있다. 반면 오늘날의 미국에서도 굴라쉬를 쉽게 만날 수 있는데, 이는 이민자들이 스스로 문화를 옮기는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 모든 요인들을 관통하는 힘은 ‘보이지 않는 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맛있는 음식을 탐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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