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좋아할 이유는 많다. 시원한 아침 공기에 여러 겹의 옷으로 멋을 낼 수 있어 좋고, 따뜻한 낮의 햇볕은 나들이를 부른다. 날씨가 좋으니 어떤 장르의 영화를 틀어도 재밌게 느껴지고, 개인적으론 가족들의 생일이 몰려 있어 더 풍요롭다. 이토록 좋은 가을이 마침내 왔다.
2년 전 가을은 나에겐 더욱 특별했다. 당시 나는 한국에서 졸업을 앞둔 취업 준비생. 절친한 친구와 자기소개서를 바꿔 읽으며 서로를 다독이는 시기였다. 나와 친구는 참 많이 만났다. 못 먹는 술을 꾸역꾸역 마시고, 취기와 함께 환절기 비염이 섞인 코맹맹이 목소리로 수다를 떨었다. 힘들었던 시기였지만 친구와 마시던 가을 공기는 나에겐 유일한 위안이었다.
하지만 기업들의 합격자 발표가 났을 때, 그곳에서 내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고 친구는 자신의 합격 소식을 알려왔다. 나는 탈락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표정이 굳은 채 친구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보냈다. 기다리던 부모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었던 그때의 가을은 참 찌질했다.
그런 가을의 씁쓸함을 뒤로하고, 올 가을 로마의 '비아 델 피그녜토'(VIA DEL PIGNETO)를 찾았다. 찌질한 추억을 잊고 싶어서였을까? 로마에서 가을이 가장 ‘핫한 동네’를 체험하고 싶었다.
이른 점심 시간 방문한 거리, 사람들은 긴 나무 벤치에 앉아 각자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엄마는 가을의 낮을 즐기며 아이와 샐러드를 먹었다. 단화에 닿는 바닥의 감촉은 보드라웠다. 하나하나의 조그만 모습이 마음에 ‘콕’ 박히는 이곳에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다란 철길과 교차하는 길 인근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이곳엔 젊은 작가와 화가, 디자이너들이 많이 살기 때문에 동네 식당의 인테리어도 감각이 뛰어나다. 덕분에 이곳엔 언제나 활력이 넘친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오래된 관광지로서의 로마와는 다른 느낌이지만 이 또한 색다른 매력이다.
평일 낮에는 장이 열린다. 사람들은 늦은 복숭아의 맛을 보고 있다. 가을이 되면 이탈리아도 우리나라처럼 감이 난다. 우리에게 익숙한 단감과 홍시도 먹을 수 있지만 이곳에서 가장 반가운 건 감 맛이 나는 젤라또! 아직은 철이 이르지만 색색의 과일을 보니 더 기다려진다. 거리의 식당들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여기는 저녁이 낮인 곳, 대부분의 식당은 오후 6~7시부터 문을 연다. 지금은 따사로운 낮의 풍경이지만 시원한 바람이 불고 저녁이 찾아오면 밤의 낭만이 깔린다.
식당과 시장의 모습
이곳의 벤치에 앉아 부드러운 바닥을 밟고 있으면 친구와 함께했던 2년전의 가을이 괜히 그리워진다. 잔디밭에 함께 앉아 푸른 하늘에 감탄하던 점심이 그립고, 잠깐의 저녁 시간 테라스에 앉아 바라보던 이태원 모스크 너머의 노을도 그립다. 그렇게 다시 맞은 지금 가을, 우리는 이제 서로의 일도 찾았고 술도 조금이지만 늘었다. 친구는 그때 붙었던 회사에 지금도 잘 다니고 있다고 한다. 나는 이탈리아, 친구는 한국에 살지만 우린 종종 연락하며 지낸다.
비아 델 피그녜토에는 누구나 앉아서 잠시 쉬어간다. 특히 수다스런 이탈리아 사람들에겐 가장 잘 어울리는 동네가 아닐까. 가볍게 시작한 대화에서 우리들의 힘들었던 가을의 기억도 다시 떠오른다. 사소하고 내밀한 추억들을 간직한 채, 이 거리에서 가을을 다시 시작해본다.
/사진: 김보연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죠'걷고 또 걷는다.' 걸작이라 불리는 도시 ‘로마’를 백 배 만끽하는 비법이다. 한때 전 유럽의 정치‧경제‧사회‧문화가 드나들었던 로마의 길은 그 자체로 하나의 보물. 작은 골목길이든, 큰 광장길이든 흥미로운 이야기와 사연이 즐비하다. 로마살이 1년 차 에디터가 전하는 ‘로마의 길’ 이야기를 통해, 콜로세움과 바티칸 너머의 진짜 로마를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