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야근 바랍니다"
"오늘 야근 바랍니다"
2018.05.24 11:35 by 김사원

 

출근 후 간단한 업무 몇 가지를 끝내고 사내 게시판에 접속했다. 눈에 띄는 제목의 게시물이 있었다.

★★★ 오늘 야근

내용은 단 한 줄이었다. 제목만큼이나 간결했다.

오늘 전사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있어 필히 오후9시 정도까지는 야근을 해야 하므로 모두 밀린 업무를 오늘 진도 빼기 바랍니다.

김 사원은 삐딱하게 앉아 마우스를 클릭하던 자세 그대로 눈꺼풀만 깜빡거렸다. 다시 내용을 읽어보았다.

 

오늘

게시글을 올린 게 언제지? 아 오늘이네. 그래 오늘.

전사적으로

회사 전체의 관심과 힘이 쏠렸다는 말을 뭔가 격조 있게 말하고 싶을 때 주로 쓰는 수식어가 '전사적'이다.

중요한 이슈

어떤 안건, 언급이 필요한 사항, 예상되는 위험, 발생한 문제... 회사에서는 이 다양한 상황을 '이슈'라는 단어 하나로 대신할 수 있다. 이번엔 심지어 중요한 이슈다.

필히

동사를 강조하는 수식어가 나왔다. '반드시, 꼭'같은 한글보다 필(必)이라는 한자어를 사용해 문장에 권위를 더한 듯하다.

오후 9시

전반적으로 모호한 문장에서 눈에 띄게 구체적인 부분이다. 혹시 오전 9시로 오해할까봐 특별히 친절하게 오후 9시라고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21시라고 표현할 수도 있었겠지만 오후 9시가 더 일찍인 것처럼 느껴진다.

정도까지는

앞서 오후 9시라고 친절하게 표현한데 반해 곧바로 모호한 표현이 이어진다. 문장의 균형을 맞추려던 걸까?

야근을 해야 하므로

군더더기 없이 명확한 표현. 띄어쓰기도 완벽하다. 그런데 주어가 없다. 야근을 해야 하는 주체는 누구일까?

밀린 업무를

밀린 업무가 있단 말이야? 업무 일정을 조정하는 게 아니라 일을 미뤘단 말이야? 고객사, 팀장, 이사가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새내기 직장인 김 사원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오늘

아무튼 밀린 업무가 있다면 오늘 하라는 거지. 다른 날 말고 오늘

진도 빼기

'진도를 빼다'할 때 빼다는 칼을 빼다처럼 뽑아냈다는 의미에 가까울까? 업무 성과를 뽑아 내놓으라는 걸까?

바랍니다

뜬금없는 소망 표현은 또 뭘까. 갑자기 소망하는 태도를 보이면 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건가.

 

아무리 오두방정을 떨며 읽어도 그저 답답하고 화가 날 뿐이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이런 성의 없는 문장 하나가 정말 끝인가? 떨리는 가슴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여전히 삐딱하게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였다. 가만히 손을 움직여 댓글창에 커서를 올리고 키보드를 두들겼다. 그래, 한번 물어나 보자.

전사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뭔가요?

잠시 후 네이트온이 깜박인다. 대화창을 열어보니 ㅋㅋㅋㅋㅋ가 잔뜩 보인다. 송 차장이 보낸 메신저다. '별별별 오늘 야근'의 대상자가 될 것이 뻔한 송 차장에게 김 사원의 댓글이 웃음을 선사한 모양이다. 웃지만 말고 황 이사에게 한마디 하시라고 볼멘소리를 보냈더니 다시 메신저가 왔다.

처자식이 생기니 그게 어려워ㅋㅋㅋ

얼마 지나지 않아 김 사원의 댓글에도 답변이 달렸다. 답변을 단 이는 황 이사가 아니라 김 팀장이었다.

A사에서 중요한 손님이 오신다고 합니다.

중요한 이슈가 뭐냐고 물었더니 중요한 손님이 온다니. 언제까지 중요하기만 하려는 걸까. 하나도 중요해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참, 그러고 보니 김 팀장도 처자식이 있지.

물론 황 이사도 처자식이 있다. 어쩌면 황 이사는 오늘 아침에 사장의 카톡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사장은 저녁에 A사 회장님과 회사에 들어가겠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했겠지.

‘어디 보자. 요즘 야근하는 애들 별로 없어서 저녁에 사무실 휑하겠네. A사에서 투자금 받으려면 이럴 때 열심히 하는 인상을 남겨줘야 되는데. 발에 땀이 나게 뛰어다니는 모습은 못 보여줄 망정 텅 빈 사무실을 보여줄 순 없지. 그런 꼴을 본다면 내가 회장이라도 투자금 못 내놓지. 김 팀장 시켜서 저녁때 애들 좀 앉아있게 해야겠다. 그전에 내가 게시판에 공지글 하나 올려두면 더 낫겠네.’

그리고 키보드에 손을 올렸겠지.

‘게시판 잘 안 보는 애들 있으니까 제목을 강조하려면 까만 별을 세 개쯤 넣어야지. 회장님 도착해서 사무실 둘러보고 차 한 잔 하고 그러면 9시 정도 되겠지. 이럴 때 밀린 일들도 좀 해놓고 그러는 거지.’

글을 올리고나서는 마음을 다잡았을까?

‘자 정신 차리고 잘하자. A사 투자금 못 받으면 내 자리도 간당간당해.’

황 이사에게도 나름의 입장이 있으리라 생각하려 했지만 김 사원의 빈곤한 상상력으로는 황 이사에게서 주저, 민망, 배려, 합리, 이성이 담긴 이야기를 도저히 떠올릴 수가 없었다.

김 사원은 저녁에 남아있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병원 좀 가려고요. 갑자기 몸이 안 좋아서요.’하고 퇴근할 생각이었다. 정말이지 출근할 때까지 멀쩡했는데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렸으니까. 황 이사의 상상력으로는 절대 떠올릴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회사에 중요한 일이 있다는데 '갑자기' 아프다는 직원을.

그날 중요한 손님은 오후 6시 전에 오셨다가 금방 나가셨다. 그래서 아쉽게도 황 이사의 상상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김 사원은 평소처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하고 퇴근했다.

퇴근하는 직장인들이 바글거리는 버스 정류장에 섰다. 버스 문까지 사람이 가득 차 있었지만 망설이지 않고 발부터 들이밀어 콩나물시루에 꼈다. 교양 없이 굴고 싶지 않았지만, 이번 버스에 안 탄다고 다음 버스에 우아하게 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흔들리는 만원 버스에서 최소한 발바닥 두 개 얹어둘 자리를 확보하는 일은 정말 힘이 많이 들었다.

최소한 발바닥 두 개, 최소한 설명, 최소한 양해, 최소한 퇴근시간, 최소한...

버스 손잡이에 매달려 오늘 하루도 겨우 마쳤다는 생각을 했다.

 

필자소개
김사원

10년 차쯤 되면 출근이 조금 담담하게 느껴진다던데요. 저에게도 10년 차가 되는 날이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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