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득함의 지옥에 빠져보자, ‘에그 인 더 헬’
진득함의 지옥에 빠져보자, ‘에그 인 더 헬’
2018.12.11 18:16 by 이창희

바야흐로 따뜻한 음식이 맛있어지는 계절. 감자탕이나 순대국에 소주 한 잔 들이켜도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건 지갑 사정이 여의치 않더라도 언제든 만만한 친구 놈 하나 불러내면 가능한 일일 터. 가끔은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혼자 음미하고 싶은 시간, 장황하게 일을 벌이고 싶은 시간이 존재하지 않던가.

 

먼저 음악을 틀자. 집에 굴러다니는, 어디선가 사은품 따위로 받아놨던 블루투스 스피커라면 충분하다. 너바나 류의 올드한 메탈이면 제격이겠으나, 너무 정신없을 것 같다면 며칠 전 극장에서 본 보헤미안 랩소디에 나오는 퀸의 넘버들만 되도 나쁘진 않다. 질질 짜기 바쁜 브리티시 밴드 스타일만 아니면 된다.

굉굉 울려대는 음악을 들으면 필시 없던 기운도 날 터다. 하지만 당신에게 지구력 따윈 기대할 수 없으므로 최대한 서둘러 재료를 준비하자.

냉장고를 열어 토마토 소스를 꺼내놓자. 연인을 불러 파스타 차려놓고 분위기 잡아보려다 실패하고 나초 칩이나 찍어 먹던 그 소스 맞다. 계란은 많을수록 좋다. 콜레스테롤 이런 거 걱정하지 말고 있는 대로 꺼내라. 치즈는, 모짜렐라 따위가 당신의 냉장고에 있을 턱이 없으니 그냥 낱장으로 된 그거 쓰면 된다. 같은 원리로 베이컨은 기대하기 어려우니 명절 선물세트로 받아둔 스팸과 냉동실에서 굴러다니는 소시지를 준비하자. 채소 중에 양파·마늘은 필수, 버섯과 파프리카는 옵션이다.

 

재료 준비가 끝났다면 팬을 불에 올리자. 후라이팬보다 좀 더 우묵하게 파인, 여차하면 찌개도 소화해낼 수 있는 용량을 가진 녀석이 좋다. 끓어 넘칠 일은 없는 음식이지만, 당신 같은 초보자는 분명 높은 확률로 양 조절에 실패할 것이므로.

올리브오일을 두르고 양파와 편마늘을 볶는다. 음악의 비트가 빠르다고 리듬타서 너무 헤집지 말고 설렁설렁 하는 것이 포인트. 양파가 영롱하게 빛나고 마늘이 거뭇한 색을 나타내기 시작하면 베이컨과 소시지를 투하한다. 1분쯤 지나면 모든 재료가 반짝반짝 빛날 것이다. 그때 토마토 소스가 들어간다.

이때부터 시간이 조금 걸린다. 전화기를 들어 밀린 카톡에 답장을 하면 된다. , 확인할 카톡이 없을 테니 그냥 기지개나 한번 켜자. 5분 정도 지나면 토마토 소스가 가가멜이 끓이던 단지 속 정체모를 액체처럼 보글대기 시작한다. 곧바로 중불로 줄이고, 계란을 조심스레 밀어 넣자. 노른자를 터뜨리지 말고 소스를 끼얹어서 계란을 익히면 된다. 치즈도 이때 살살 올려주면 된다.

 

이제 완성이다. 그럴 일 없겠지만 혹시라도 파슬리나 바질이 있다면 위에 뿌려주자. 사실 그런 가루들이 비주얼이나 허세를 위한 것인 줄로만 알았지만, 알고 보면 향 자체가 크게 달라진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는 깻잎 두 장 차이다.

멋 부린다고 접시에 옮겨 담지 말고 팬 그대로 테이블에 올리자. 온기가 사라지면 상당히 먹기 애매한 음식이 된다. 부드러운 빵을 찢어 찍어도 먹고 담가도 먹어보자. 톡톡 터지는 진득한 노른자가 그대의 허한 감성을 어루만져줄 것이다.

 

Atmosphere & Mariage

-하늘이 흐린 주말 오후

-스파클링 와인 혹은 에일 맥주

Recipe

-토마토 소스

-계란

-치즈

-베이컨, 소시지

-양파, 파프리카, 마늘, 버섯

-소금, 후추, 올리브오일

-

 

필자소개
이창희

부(不)편집장입니다. 편집을 맡지 않았고 편집증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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