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영화 소재의 변천사로 본 재난의 역사①
재난영화 소재의 변천사로 본 재난의 역사①
2018.12.26 18:11 by 이지섭

결과 뻔하잖아. 도대체 무슨 재미로 보는 거야?”

 

재난영화는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리는 장르입니다. 누군가는 소위 눈호강이라 불리는 시각적 스펙터클에 열광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뻔한영화로 치부해 버리기도 하죠. 대부분의 재난 영화들이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일뿐더러, 장르를 관통하는 핵심공식이 있을 정도이니 뻔하다는 표현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겠네요.

하지만 재난영화가 그저 뻔하기만 한 영화였다면 영화사()의 출발과 함께하며 버젓이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는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재난영화는 1900년대 초반, 작은 모티프 수준으로 등장한 이래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새로운 영화로 생산되고 있습니다. 긴 시간 동안 자신의 모습을 바꿔오면서 말이죠. 그 사이 재난영화의 소재 즉, 중심이 되는 '재난'은 끊임없이 변해왔습니다. ‘영화는 시대를 반영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재난영화가 변모하는 과정 안에는, 인류가 경험한 재난의 흔적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재난의 역사'를 바라 볼 수 있습니다.

 

1930년대, <인 올드 시카고><샌프란시스코>, 실제 일어났던 자연재해를 담다

영화 역사의 초창기인 1900년대부터 함께해 온 재난영화는 1930년대에 본격적인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았습니다. 당시에는 재난을 소재로 한 다양한 창작극들이 많이 탄생했는데요, 큰 홍수가 뉴욕을 파괴하는 모습을 그린 '대홍수(Dulge)'를 비롯해 재난영화의 시초라고 불리는 작품들이 대거 등장했습니다. 그 중 돋보이는 영화는 두 작품, ‘인 올드 시카고(In Old Chicago, 1938)’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1936)’입니다. 이들은 모두 가까운 과거에 일어났던 실제 재난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와 '인 올드 시카고' 포스터 (사진: 씨네21, IMDB)
'샌프란시스코'와 '인 올드 시카고' 포스터 (사진: 씨네21, IMDB)

1930년대 재난영화의 대표적인 작품인 '인 올드 시카고'는 욕망이 투영되는 도시, 시카고가 큰 화재로 몰락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시카고라는 도시를 모두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 말겠다는 야망을 다진 주인공 다이안은 진정 소중한 것을 잊고, 자신의 욕심을 실현하기 위해 온갖 일들을 벌입니다. 자신의 탐욕의 대상이 되는 도시가 무너지고 나서야 뒤늦은 깨달음을 얻지만 이미 때는 늦었죠. 한 인물의 욕망이 투영된 시카고가 무너지고, 그 안에서 온갖 인물들이 느끼는 슬픔을 극적으로 표현해낸 명작인데요, 이는 1871년 시카고에서 실제로 발생한 '대화재'를 영화화 한 것입니다.

'시카고 대화재'19세기 미국에서 일어난 화재 중 가장 큰 규모의 화재였습니다. 도심을 향해 강하고 건조한 남동풍이 불고 있던 어느 날, 한 집의 헛간에 불이 붙기 시작합니다. 당시 시카고에는 건물의 약 60%이상이 목재건물이었고, 도로도 마찬가지였죠. 작은 불씨로 시작한 화재는 이 집 저 집 옮겨 붙으며 세력을 빠르게 키워나갔죠. 그렇게 시작된 화재는 3일동안 이어졌습니다. 시카고라는 도시는 말 그대로 불바다가 됐습니다. 9에 달하는 도심 지역을 불태우며 시카고를 초토화시켰고, 300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졸지에 집을 잃은 떠돌이 신세가 되어버렸죠.

 

시카고 대화재를 그린 그림 (사진: John R. captain)
시카고 대화재를 그린 그림 (사진: John R. captain)

또 다른 대표작 샌프란시스코인 올드 시카고보다 2년 앞서 개봉한 작품으로, 재난영화에 뮤지컬이라는 형식을 섞은 작품입니다. 개봉한 그 해 전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530만 달러의 매출을 낸 흥행대작인데요. 30년대를 휩쓴 이 샌프란시스코인 올드 시카고와 마찬가지로, 실제 재난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20세기 최악의 자연재해 중 하나인,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바로 그 것이죠.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당시의 모습 (사진: 위키백과)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당시의 모습 (사진: 위키백과)

1906418일 새벽 5. 산 안드레아스 단층에서 감지된 최초의 진동은 단 2분 만에 샌프란시스코에 도달해 도시를 뒤흔들었습니다. 파도같이 요동치는 지진은 도심을 거칠게 집어 삼켰죠. 목조 건물들은 장난감처럼 무너졌고, 도로는 아래로 꺼졌습니다. 건물이 무너지며 거리의 사람들을 덮쳤고, 송유관이 폭발하며 큰 불이 일었습니다. 지진의 여파가 가시지도 않은 상태에 발생한 화재는 도시를 통제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490개의 시 구역에서 약 25천개의 건물이 파괴됐죠. 샌프란시스코의 약 80%가 일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지진과 연이은 화재로 인해 3천여 명의 사람들이 희생됐고, 3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집을 잃고 피난민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졸지에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앉았죠. 정부는 수만 명의 이재민들을 위해 급식과 대피소 및 의류를 제공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집을 잃은 피난민들 사이에서는 수시로 폭동과 약탈이 발생하는 등 재앙 이후 거리에는 광기가 넘쳐났습니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당시의 피난민들 (사진: 위키백과)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당시의 피난민들 (사진: 위키백과)

서부 무역의 중심지이자 태평양으로 통하는 관문이었던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은 샌프란시스코에 4억 달러로 추정되는 부동산 손실액을 남기며 도시의 모든 기능을 마비시켰습니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는 빠르게 재건됐죠. 정부가 지진 직후부터 재건 계획을 수립했고 착수한 덕분입니다. 인류는 대재앙의 습격에 좌절하지 않고, 더 높이 뛰어올랐죠. 하지만 재난의 아픔은 잊을 수 없는 상처로 역사에 새겨져 있습니다. 1906418일은 여전히, 아픔의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재난영화가 태동하기 시작한 1930년대, 그리고 그 시기의 스크린을 장악한 두 영화 '인 올드 시카고''샌프란시스코'. 두 영화 속에는 인류의 아픔이 녹아 있습니다. 통제할 수 없는 자연과 충돌했을 때 필연적으로 싹틀 수 밖에 없는, 나약하디 나약한 인류의 아픔이 말이죠.

 

1970년대, <에어포트><타워링 인페르노>, 불안한 사회의 모습을 투영한 사회적 재난 이야기

재난영화는 1970년대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1977, 영화 잡지인 <버라이어티>지는 미국 영화 역사상 최고의 흥행작들을 선정했는데요, 이 중 70년대에 탄생한 재난영화가 4편이나 있었습니다. 그만큼 70년대는 많은 재난영화가 탄생해 상당한 흥행실적을 올렸죠. 그 중 가장 크게 흥행 한 작품이자, 70년대 재난영화를 대표하는 두 작품은 바로 에어포트(Air Port, 1970)’타워링 인페르노(Towering Inferno, 1974)’입니다.

 

'에어포트'와 '타워링 인페르노'의 영화 포스터 (사진: 씨네21)
'에어포트'와 '타워링 인페르노'의 영화 포스터 (사진: 씨네21)

1970년 개봉한 영화 '에어포트'70년대 재난영화의 출발을 알리는 작품입니다. 영화는 당시 150만 달러의 흥행실적을 냈는데, 2010년 기준으로는 158천만 달러 정도로 추정되는 금액입니다. 한 비행기에 자살을 하려는 폭탄전문가가 타게 되고, 비행기는 폭설이 내려 고립된 공항에 착륙하기 위해 회항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고립된 공간에서 엮이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구조는 관객들에게 자연스럽게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비행기 재난영화의 시초 격인 에어포트는 이후 '에어포트75', '에어포트77', '에어포트79' 시리즈 등 수 많은 속편을 만들어내며 흥행을 이어갔습니다.

1974년에 개봉한 '타워링 인페르노'는 장르의 유행을 이끈 명작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135층의 초고층 빌딩 '글라스타워'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요. 건물 안에 고립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죠. 실제로 빌딩에 화재가 발생할 경우, 마천루의 화재를 진압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데, 이러한 모습을 영화 속에 잘 표현해 낸 덕분에 ‘70년대 미국 재난영화의 정점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높은 건물에 화재가 나 고립된 사람들을 구출한다'는 내용의 영화들은 대개 이 타워링 인페르노의 영향 아래 있다고 볼 수 있죠. 국내에서 2012년에 개봉한 영화 '타워' 또한 그런 작품 중 하나입니다.

 

'타워링 인페르노'는 국내에서 개봉한 '타워'를 비롯한 많은 영화에 영향을 미쳤다. (사진: doblaje.wikia)
'타워링 인페르노'는 국내에서 개봉한 '타워'를 비롯한 많은 영화에 영향을 미쳤다. (사진: doblaje.wikia)

눈치 채셨겠지만, 70년대에 흥행한 작품들은 30년대의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우선, 실제 역사 속에서 일어난 자연재해가 아닌 허구의 사회적 재난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또 고립된 장소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죠. 70년대의 재난영화 대부분은 고립된 상황을 상정합니다. 앞서 소개한 두 작품 이외에도, 70년대를 강타한 영화이자, 타이타닉의 아버지 뻘 되는 영화인 '포세이돈 어드벤쳐'는 좌초된 초호화 여객선이라는 닫힌 장소를 배경으로 합니다.

1970년대 재난영화의 이러한 특징은, 당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 불안감에 대한 은유입니다. 조금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당대 미국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게 맞겠죠. 당시 재난영화의 생산을 도맡아 한 미국에게 있어 1970년대는, 부정적인 의미로 역동적인 시기였습니다.

미국은 당시 경제, 정치, 사회 모든 측면에서 문제를 겪고 있었습니다. 50만 명이 넘는 지상군이 파병된 베트남전쟁은 미국의 패배로 끝났고, 석유파동으로 인해 경제는 어려워졌으며 실업문제가 극심한 상황이었죠. 또한 워터게이트 사건(1972년 닉슨 대통령의 재선을 위한 비밀공작팀이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위원회 본부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된 정치적 사건)으로 닉슨대통령이 사임하는 등 말 그대로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1974년 복지시설(Welfare office) 앞에 서있는 미국인들 (사진: CNN Politics)
1974년 복지시설(Welfare office) 앞에 서있는 미국인들 (사진: CNN Politics)

정부에 대한 불신과 국가에 대한 신뢰가 곤두박질 쳤죠. 국가적인 위기 상황은 공들인 탑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잘 가고 있는 것만 같던 비행기에 문제가 생기고, 어떤 것보다도 더 높이 쌓아 올린 타워에 불이 나고, 좋아 보이기만 했던 여객선이 갑자기 좌초되는 내용은 당시 미국사회를 투영하고 있습니다. 대재앙이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는 내용에 사람들은 더 쉽게 몰입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영화를 보며 다시금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다졌죠. 당시의 영화 속에는 희미하지만 아주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사회질서의 균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며,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1970년대의 재난영화에는 좌절과 희망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사회적인 재난 앞에 무력해져 그 자리에 주저 앉아야 할 것만 같은 좌절의 기운. 그리고 위기를 극복함으로써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는 옅은 희망. 무언가가 충돌할 때 보이는 빛은 더 밝아 보이는 법입니다.

 

에서 계속됩니다.

 

*본 콘텐츠는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 공식블로그에 공동 게재되었습니다

 

필자소개
이지섭

미스터빈 닮은 꼴. 멍청한 글을 멀쩡하게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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