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넷째 주
양초에 대한 가장 강렬한 기억. 2013년 겨울, 캄보디아였다.
에너지 빈민촌 취재 차 방문한 나무 오두막에선
일가족 다섯 명이 촛불 하나에 의지한 채 밤을 마주했다.
여기저기 떡진 촛농과 검게 그을린 자국은 고단한 일상의 흔적이다.
해가 떨어지면 숙제조차 할 수 없는 아이들.
촛불이 옮겨 붙지 않을까 조바심에 밤새 뒤척여야 하는 부모.
그때 느낀 양초는 ‘결핍’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이 물건. 생각해보니 결핍만 녹아있는 게 아니다.
축복 속에 태어나, 다른 사람들과 뒤섞여 사는.
늘 부족함을 느끼지만, 한번쯤은 찬란한 시기를 맞고, 가끔씩 여유도 만끽하는.
인간의 생애주기별 정서가 묘하게 배어있다.
먼저 ‘축복’. 고대 그리스에선 아이가 태어나면, 달 모양 빵에 초를 꼽고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에게 축복을 바랐다고 한다.
촛불은 소원과 신을 잇는 다리 역할이었다고.
오늘날 생일‧기념일‧종교의식 때 초를 켜게 된 유래다.
‘결집’의 의미도 강하다. 혼자는 어둡지만, 모이면 세상을 밝힐 수 있다는 믿음 때문 일거다.
우리나라에선 2002년 6월 주한미군 장갑차량에 의해 숨진 두 여중생의 사인 규명과 추모를 위해 처음 촛불집회를 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최근엔 ‘촛불문화제’라는 용어로 순화해 쓰고 있다.
빛나는 성질은 ‘찬란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엘튼존의 노래 ‘Candle in the wind’는 그가 아꼈던 배우 마릴린 먼로에게 바쳤던 헌정곡인데, 그녀의 위대함과 찬란함을 바람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촛불에 비유한다.
최근 들어 양초는 오히려 ‘멋과 여유’를 담은 아이템으로 통한다. 로맨틱이면 로맨틱, 파티면 파티. 분위기 잡는 소품의 대명사다. 혹자는 “패션‧뷰티‧리빙을 녹여 하나로 굳어내면 양초가 된다”고 할 정도.
12월 22일 동지는 ‘캔들나이트’ 행사가 열리는 날이다.
전력난 생각해서 잠시라도 ‘전깃불 끄고 초를 켜자’는 자발적인 캠페인이다.
이날 초의 얼굴은 환경과 절약이다.
매년 허투루 넘겼지만, 올핸 나도 한번 해볼란다.
초에 녹아있는 내 삶 곳곳에 대해 회상도 해볼 겸.
/글: 최태욱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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