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빡빡해졌어요. 돈이 잘 쓰이는지 의심하는 눈초리가 은연중에 드러나죠. 처음 파트너십을 맺을 때 요구하는 내용도 많아졌고요.”
국제구호개발 NGO에서 기업 모금을 담당하는 A팀장의 말이다. 통상 기업과 NGO의 파트너십은 뜻과 자본을 전달하는 기업과, 이를 바탕으로 실제 사업을 구상하고 실행하는 NGO의 협업으로 이뤄진다. A팀장은 “일련의 사건으로 형성된 기부포비아가 기업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지난해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 논란, 올해 새희망씨앗·이영학 사건 등이 기업의 CSR, 특히 사회공헌 영역을 움츠러들게 했다는 지적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연말 모금 캠페인 ‘사랑의 온도탑’(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도 이 같은 분위기가 감지된다. 23일 현재, 이 온도탑의 수치는 40.7도(목표액 1% 달성하면 1도 상승한다. 올해 목표액은 지난해보다 3% 증가한 3994억원.) 경기불황․정국혼란 등 최악의 상황에 맞닥뜨렸다는 지난해 같은 시기보다 6% 이상 저조한 수치다. 참고로 올해 한 달간 모금한 금액을 2015년엔 보름여 만에 달성했다. 원인을 소극적인 기업에서 찾는 전문가들이 많다. 해당 캠페인에서 70%에 달하는 모금 지분을 차지하는 게 바로 기업기부이기 때문.(2016년 68.1%, 2015년 71.9%) 기업 사회공헌 위축론이 대두되는 이유다.
하지만 이런 위기상황에서 꿋꿋이 자사의 사회공헌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기업들도 적지 않다. 어려울 때일수록 전략적으로, 힘든 일일수록 함께 만들어가길 원하는 기업들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기업 사회공헌 전략은 외부 상황에 의해 좌지우지되거나 유행에 흔들려선 안 되며, 책임을 다하기 위해선 지속성과 진정성이 담보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불신을 신뢰로 바꿔 놓을 수 있는 힘은 결국 그 두 가지가 축적되며 얻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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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발전에 기여함을 물론, 사회적 가치 창출을 통해 사회와 더불어 성장한다.’
지난 3월, SK그룹은 주주총회를 열어 기업 정관을 수정했다. 이익추구와 더불어 사회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으로 나아가겠다는 선포다. 기업사회공헌컨설팅그룹 ㈜플랜엠의 김기룡 대표는 이에 대해 “CSR이 기업의 부속적인 활동이 아니라 기업 본업이 된 분기점”이라고 평가했다.
사실 SK의 ‘사회적 기업’ 사랑은 워낙 각별했다. ‘행복도시락’이란 사회적 기업을 처음 선보인 게 벌써 12년 전. 2011년엔 그룹 내 구매대행업체 ‘행복나래’를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했고, 이듬해엔 세계 최초로 KAIST와 함께 ‘사회적 기업가 MBA’를 개설했다. 2014년 옥중에 있던 그룹총수가 ‘새로운 모색, 사회적기업’이란 책을 펴냈을 정도다.
사회적 기업의 사회적 가치를 평가해 인센티브를 준다는 ‘사회성과인센티브(SPC)’의 개념을 정립한 건 SK가 10년 넘게 한 우물을 파온 결과다. 지난 4월, 총 93개의 사회적 기업이 참여한 ‘제2회 사회성과인센티브 어워드’에선 각 기업들이 창출했다고 평가받은 사회적 성과(201억원)의 24%(48억원)를 인센티브로 지급하기도 했다. 김기룡 대표는 “기업 사회공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진정성은 사실 비용 규모와 실제 집행 여부에 달려있다”며 “이런 맥락에서 SK의 사회공헌은 귀감이 될 만한 사례”라고 평가했다.
지난 2011년 기업 사회공헌 영역에 CSV(공유가치창출) 개념이 도입되면서, 기업 사회공헌의 패러다임은 요동쳤다. 단순·일회성 기부에서 상생의 단계로 넘어온 것. SK의 사례에서 보듯, 최근 사회공헌의 트렌드는 이러한 성향이 한층 짙어졌다. 꽂히는 것에 집중하고, 오래 지속하여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보겠단 의지다. 업종의 강점을 최대한 살린 맞춤형 사회공헌이 점점 늘고 있는 것도 그래서다. NGO의 한 관계자는 “기업에서 협업제안을 할 때, 기업의 정체성을 담은 사회공헌 사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고 말했다.
‘기프트카 캠페인’을 통해 저소득층에게 창업용 차량을 지원하고 있는 현대자동차(2010년~현재), ‘꿈에그린 도서관’ 조성사업으로 장애인 시설의 유휴공간을 도서관으로 개조해주는 한화건설(2011~현재), 보일러를 포함한 주거환경개선사업을 펼치고 있는 ‘귀뚜라미보일러’ 등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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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사회공헌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연합체’ 구성이다. 사실 ‘뭉친다’는 자체가 신선한 건 아니다. 정부·기업·민간이 힘을 합치는 ‘민관협력사업’은 이미 대세로 자리 잡았고, 동종업계의 공조 또한 꾸준히 이뤄져 왔다. 19개의 생명보험회사의 출연금으로 이뤄진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2008년 설립), 20개의 시중은행이 참여한 ‘은행권청년창업재단’(2012년 설립), 8개의 신용카드회사가 뭉친 ‘신용카드사회공헌재단’(2017년 설립)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최근에 구성되는 연합체는 그 성격이 약간 다르다. 이종(異種) 간의 결합은 물론, 대기업-중소기업, 대기업-스타트업, 스타트업-스타트업 등 다양한 분야의 컬래버레이션이 이뤄진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사회공헌 연합체는 기획과 실행 단계에서 다양한 자원과 아이디어가 결합되기 때문에, 대상의 범위나 효과성 등을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가장 대표적인 모델로 ‘행복얼라이언스’를 꼽을 수 있다. 행복얼라이언스는 기업 사회공헌 활동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결성된 국내 최초 사회공헌 연합체. 동부화재, 아름다운 커피, 금호타이어, SM엔터테인먼트, LIG넥스원 등 언뜻 보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기업 24개사가 뜻을 모았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 ‘행복나눔재단’ 등 비영리재단이나 ‘요기요’ 같은 스타트업도 함께 한다. 현재는 아동을 위한 도시락형 공공급식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과 사회공헌을 접목한 사례도 최근 부각된 특징 중 하나다. 지난 17일 ‘제12회 대한민국 사회공헌대상’에서 교육부장관상을 수상한 LG CNS는 올 한 해 동안 20개 중학교, 2700명의 학생들에게 청소년을 위한 IT 프로그램 ‘코딩 지니어스(Coding Genius)’를 교육·운영했다. 지난 8월, 삼성전자가 저시력 장애인을 위한 가상현실 기기 ‘기어VR 전용 모바일 앱’을 선보이는 것 역시 4차 산업과 사회공헌을 접목한 사례라는 평가다.
우리나라의 기업 사회공헌 활동은 안팎의 불안함 속에서도 성장을 거듭해왔다. 3조원에 육박하는 규모와 61.8%에 달하는 자체 사회공헌 프로그램 비율이 이를 증명한다. 지난해 불경기 탓에 사회공헌 활동이 위축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10곳 중 7곳이 신규 프로그램을 론칭했다.(2016 사회공헌백서, 전경련)
하지만 무너진 신뢰에 제동이 걸렸다. 경기침체도 막지 못한 사회공헌 열정에 ‘불신’이 찬물을 끼얹은 격이다. 답은 정해져 있다. 앞서 언급한 사회공헌의 덕목, 지속성과 진정성을 지켜나는 것. 이를 통해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다. NGO단체의 한 관계자는 “지속성 있는 기업 하나가 오래 지탱해 주면 사업의 안정성은 높아지고 그만큼 변화의 폭도 커진다”면서 “전반적으로 기부심리가 위축된 상황이니만큼 기업이 기부문화 회복의 첨병 역할로 나설 수 있길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