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향기인 줄 알았는데
강렬한 첫맛과 흐릿한 끝맛 사이, 전주 이강주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향기인 줄 알았는데
2018.05.17 19:41 by 이창희

시작은 미약하나 끝이 창대한 것이 있고, 그 반대인 것도 존재한다. 끝이 창대하다 해서 미약했던 시작이 사라지는 것도, 끝이 미약하다 해서 창대했던 시작을 부정할 수는 있는 것도 아니다. 술도 그러하다. 마지막 잔이 아쉽다고 해서 첫잔의 임팩트를 잊을 수는 없는 법. 미덕의 추를 어디에 걸어두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이번 주 <전통주 다이제스트>의 주인공은 시작과 끝의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라 외치는 전주 이강주다.

고려청자는 아니지만 늠름한 첫인상. (사진: 不편집장)
고려청자는 아니지만 늠름한 첫인상. (사진: 不편집장)

이강주는 음식이 좋기로 유명한 호남 지방, 그 중에서도 손꼽히는 맛의 도시전주 태생이다. 지난주에 다뤘던 진도 홍주 그리고 정읍 죽력고와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3대 명주로, 점잖은(?) 맛 일색인 전통주 라인업에서 상대적으로 강한 개성을 어필하는 멤버다.

밑술을 빚은 뒤 증류를 거치는 과정까진 여타 전통주와 같다. 여기에 배와 생강의 즙, 계피, 울금, 벌꿀을 넣고 숙성시켜 그 개성을 만들어낸다. 증류주 특유의 높은 알콜 도수를 희석이 아닌 천연 재료들로 상쇄하는 것.

자연히 목넘김은 부드러워지고 입안에는 청량감을 선사한다. 취해도 정신이 맑아지며 숙취 또한 적은 것으로 알려지지만, 세상에 그런 술이 존재한다고 믿는 이는 없을 터다.

높은 인지도에 비해 관련 유래나 설화가 많지 않다. 조선시대 상류층이 즐겨 음용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고종임금 시절 한미 통상조약 체결 당시 사용됐다는 정도가 전부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6호이자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9호로 지정된 조정형씨가 대표적 전승자다.

(이강주를 빚는 조정형 명인. 사진: 전주 이강주)
(이강주를 빚는 조정형 명인. 사진: 전주 이강주)

WHEN: 스승의 날 심야

WHERE: 서울 영등포 일대

DISHES: 활어회, 성게

MEMBERS: 순천만 필리버스터(37·국회의원), 세종시 조세피난처(33·탈세전문기자), 석촌동 S라인(33·S기업 대리), 양평 알레그로(31·발레리노), 편집장(35·본 에디터)

 

약관과 불혹의 가운데에 끼어 있는 30대 사내 다섯이 한 자리에 모였다. 여성 멤버가 있다는 예고를 미끼로 사용했는데 예상대로 모두 낚여들었다. 감사하게도.

석촌동 S라인: 향이 사케하고 비슷한데, 뚜렷한 청량감이 있네.

세종시 조세피난처: 날카롭지만 기분 좋은 느낌의 기습.

편집장: 이게 배하고 생강으로 담근거라며. 단내도 있고 매콤한 향도 나네.

세종시 조세피난처: 아주 강하진 않지만 분명 타격감이 느껴져.

편집장: 그놈의 타격감은... 담배 좀 끊어.

순천만 필리버스터: 끈적끈적하네 술이. 배의 단맛이 먼저 와닿지만 생강의 쌉쌀함이 뒤에 치고 올라오는 듯.

양평 알레그로: 나도 잘 만든 사케 느낌에 한표.

 

언제나처럼 시작이 좋다. 거의 모든 전통주는 익숙하지 않다는 게 매력이라.

세종시 조세피난처: 근데 이거 700ml 한 병에 얼마?

편집장: 마트에서 29,000원인가.

석촌동 S라인: 비싼 거 아닌가?

편집장: 와인 가격 생각하면 뭐. 평양냉면이 비싸다고 하지만 파스타 생각하면 그런 것도 아닌 것처럼.

순천만 필리버스터: 이 자기로 만들어진 술병 가격은 얼마쯤 할까? 대량으로 주문해서 말야.

세종시 조세피난처: 개당 500원쯤?

석촌동 S라인: 5000?

순천만 필리버스터: 2000원 정도 할 거야. 원래는 500원 쪽에 가깝긴 한데, 기본 디자인이 아니라 직접 디자인한 거라 가격이 좀 붙을 듯.

편집장:, 그럼 공병으로 팔면 소주 한 병은 받아야겠네.

석촌동 S라인: 600년 뒤에 사연 진품명품에서 500만원에 팔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

이렇게 생긴 박스에 담겨 판매된다. (사진: 不편집장)
이렇게 생긴 박스에 담겨 판매된다. (사진: 不편집장)

역시 경제적 관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30대들의 대화다.

순천만 필리버스터: 몇 잔 마셔보니, 아 내일도 마시고 싶다 하는 정도는 아닌 듯. 마실수록 배 맛하고 생강 맛이 옅어져가.

편집장: 내성이 생기는 건가? 역시 이것도 뒷심 약한 LG트윈스 스타일이로군.

석촌동 S라인: 야구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버두치 리스트라고 있어. 한해 100이닝 이상 던진 투수가 이듬해 부상 확률이 급격히 올라간다는 건데, 이게 70% 이상 맞아떨어져.

세종시 조세피난처: 근데 갑자기 이 이야기는 왜?

석촌동 S라인: 우리도 오늘 너무 마시면 내일은 내상 확률이 높아진다는 그런 교훈을 추출할 수 있지.

편집장: 데이터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건 별로. 출루율만 따지는 빌리빈도 그렇고, 드라마틱한 스포츠에 낭만이 없잖아 너무.

 

스포츠 이야기가 나왔다. 이제 남은 건 군대 이야기인가.

석촌동 S라인: 근데 전통주 다이제스트는 어떻게 시작한 거야? 1화가 궁금하네.

편집장: 첫 주인공이 바로 이번 남북정상회담 만찬주인 면천 두견주였어. 향긋한 진달래술.

순천만 필리버스터: 진달래꽃 향을 맡아본 적 있어, 다들?

세종시 조세피난처: 맡아본 것 같은데.

순천만 필리버스터: 진달래꽃은 거의 무향에 가까워. 철쭉도 그렇고. 아니, 향이 없는데 두견주를 마시고 왜 향이 난다고 할까 항상 의문이었음.

석촌동 S라인: 그럼 향이 난다는 사람은 죄다 허세네 허세.

편집장: 그래 다 허세야. 이강주도 뭐, 배가 들어갔는지 어떻게 알거여.

세종시 조세피난처: 향기가 나지 않는 꽃은 있어도 냄새가 나지 않는 돈은 없는 법이지.

 

술의 향기가 사라진 자리에는 알쓸신잡의 향기가 스며든다.

편집장: 이강주를 이성에 비유하면 어떤 느낌일까.

세종시 조세피난처: 처음엔 분명 괜찮았는데 만날수록 아쉬움이 커진다고 해야할까.

석촌동 S라인: 난 반대. 처음엔 그냥 그랬는데, 점점 괜찮아지는 것 같음.

순천만 필리버스터: 본인의 경험담 이야긴가?

석촌동 S라인: (동공 지진) 아니, 아니야.

양평 알레그로: 결혼은 어때? 그것도 처음엔 좋다가 나중에 별로가 되는 건가?

순천만 필리버스터: 인생 혼자 사는 거야.

석촌동 S라인: 나 날짜 잡았는데. 흐음.

순천만 필리버스터: 다시 이야기해줘?

 

나름 의미는 있는데 재미를 찾기 어려운 대화들이 이어진다. 전통주를 마시더니 다들 선비로 빙의한 모양.

편집장: 이제 2병째인데, 중간 평가 부탁.

석촌동 S라인: 사케.

편집장: 이런 친일파 같으니라고.

석촌동 S라인: 참나. 일본 한 번도 안 가봤는데.

양평 알레그로:, 소주에 단맛이 얹혀진 느낌.

세종시 조세피난처: 명품을 입은 평민이랄까. 술병도 아름답고 명인이 만들었고, 배경은 다 좋아. 하지만 재야의 고수가 정종과 소주와 물을 잘 배합하면 이 정도 맛은 나올 것 같아.

순천만 필리버스터: 모든 음식이 원재료의 맛을 살리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잖아? 그런데 이강주는 배와 생강이라는 향이 강한 재료들을 첨가한 것이 특징이고, 결국 처음 이 술을 빚을 때 분명 맛의 아쉬움이 있었을 거라고 봐. 그래서 이것 저것 넣어보고 하다가 최적을 찾은 게 아닐까 싶어.

의미를 쫓는 이야기에 묻혀 존재감을 전혀 발하지 못했던 이날의 안주. 마리아주 따윈 가늠도 못했다. (사진: 不편집장)
의미를 쫓는 이야기에 묻혀 존재감을 전혀 발하지 못했던 이날의 안주. 마리아주 따윈 가늠도 못했다. (사진: 不편집장)

세종시 조세피난처: 오늘 전반적으로 이강주에 대한 평이 좋게 흘러가진 않는데?

석촌동 S라인: 이 술 만드는 사람들이 들으면 속상하려나.

양평 알레그로: 정치인들은 악플 받으면 어때?

순천만 필리버스터: 하루에 65만개도 받아봤는데, 처음엔 많이 힘들었지. 너무 충격이 커서 3일 동안 입원도 했어. 대인기피증 증세도 생기고, 연예인들이 왜 자살을 하는지도 이해가 되더라고.

석촌동 S라인: 어떻게 극복이 됐어?

순천만 필리버스터: 사흘 내내 병원에 우두커니 앉아있는데, 마지막 날이 하필 월급날이더라고. 잘 생각해봐. 연예인은 악플 세례를 받을 정도면 보통 밥줄이 끊기잖아? 근데 정치인은 안 그렇잖아. 내가 병원에 있어도 월급이 나오는 것을 깨닫고, 이상한 구석에서 자신감이 생겨 4일째 출근했어.

편집장: 자본주의 의문의 1.

 

분량 걱정에 한숨이 절로 나오는데 분위기는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기어코 재미를 눌러버린 의미에 경의를.

석촌동 S라인: 기왕 정치 이야기가 나온 김에, 현재 우리나라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뭘까.

편집장: 유권자 수준 문제라고 봐. 아직도 논리가 정서를 이기지 못하는 게 우리나라 아닌가. 지금은 미디어 홍수 시대잖아. 객관적 팩트를 전달하는 신문의 시대는 끝났고, 이제는 같은 사안을 놓고 기자들과 매체들이 서로 다르게 해석하면서 경쟁하는 게 맞지 않나? 독자는 그걸 보고 판단을 내리는 거고. 근데 그 판단력의 수준이 아직 올라오지 못하고 있는 거지. 그 수준만 성숙하면, 사실상 이익집단에 가까운 정당이나 신문들이 지금의 작태를 함부로 보일 수는 없을 텐데.

순천만 필리버스터: 그 수준이 만들어진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우리나라 헌법 11,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이걸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 4년제 대학을 나오고 30대인 우리 역시도 다르다고 할 수 없고.

세종시 조세피난처: 그럼 문제는 교육?

순천만 필리버스터: 그렇지. 우린 그동안 오랜 독재를 거치는 과정에서 국민은 국가의 부속물에 불과한 존재로 인식됐고 교육도 그에 맞춰 이뤄졌잖아. 정치가 이렇게 된 이유고. 우리가 민족중흥의 사명을 띠고 태어난 게 아닌데 말야.

편집장: 다시 국회 들어가면 이런 시니컬한 스탠스를 계속 유지하길.

순천만 필리버스터: 아냐, 오직 성공만 노리고 열심히 줄타기에 매진할 거야.

 

필자소개
이창희

부(不)편집장입니다. 편집을 맡지 않았으며 편집증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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