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를 좋아하는 건 고양이만이 아니다(下)
규제샌드박스 본격 시행, 그 후로 2년
모래를 좋아하는 건 고양이만이 아니다(下)
2021.02.15 22:37 by 최태욱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탄생한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비상장 스타트업)은 단 1개. 2018년 이후 삼 일에 하나 꼴로 탄생하는 세계적 흐름에 비춰보면 초라한 성적표다. 같은 기간 우리나라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 비율은 전년 대비 11% 이상 감소했다. 세계 최상위권의 학업성취도와 ICT인프라를 자랑하는 나라인데도, 기업은 경쟁력이 없고 시장은 매력이 없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모두 최고 사양인데 정작 성능은 시원찮은 컴퓨터라니, 그 이유가 뭘까? 많은 전문가들은 그 답을 ‘규제’에서 찾는다. 높다랗고 굳건한 규제 장벽이 기업의 활력을 저해한다는 것. “일론머스크도 한국에선 범법자일 뿐”이라는 우스갯소리에는 국내 혁신가들의 자조와 허탈함마저 깃들어있다.

같은 맥락에서 2019년 1월 정부가 도입한 규제샌드박스는 그 자체로 큰 의미를 갖는다. 혁신성장을 위한 진단과 처방이 모두 적확했기 때문이다. 국내 스타트업들이 마음껏 혁신할 수 있는 장을 열기 위해 낡은 규제를 면제·유예해주겠다는 정부의 의지는 “기존 틀을 깨는 과감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존 헤네시 구글 의장의 조언과도 맞닿아있다. 그로부터 2년, 한국형 규제샌드박스는 성공한 정책이란 평가 속에 현장에 안착했다. 승인 404건, 투자유치 1조 4344억원, 고용효과 2865명 등의 정량적인 성과도 빛났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그늘도 존재한다. 규제샌드박스 시행 2년째를 맞아 <더퍼스트미디어>에서 해당 제도의 한계와 개선점을 들여다봤다./편집자 주

 

한국형 규제샌드박스는 혁신성장을 위한 K-스타트업의 마스터키가 될 수 있을까
한국형 규제샌드박스는 혁신성장을 위한 K-스타트업의 마스터키가 될 수 있을까

| 모래의 배신… 놀이터인줄 알았더니 늪이었다

“통과도 퇴짜도 아닌 상태로 2년이에요 2년… 이 정도면 그냥 문 닫으란 소리 아닌가요?”

남승미 딜리버리티 대표가 체념한 듯 말했다. 남 대표에게 정부가 제공한 모래놀이터는 고립무원의 사막이나 다름없다. 택시를 활용한 소화물 배송 서비스를 제공하는 딜리버리티가 처음 규제샌드박스의 문을 두드린 건 2019년 4월. 시작은 순조로웠다. 창업진흥원,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할 것 없이 좋은 평가를 내렸고, 택시기사 1000여 명이 모일 만큼 시장의 호응도 뜨거웠다. 

“화물 기사는 늘 부족한데 택시는 넘치잖아요. 그런 자원을 재분배하고 결합해서 시너지를 만들어보자는 게 우리 비즈니스의 핵심이었죠.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한다는 의미로 ‘소셜벤처’ 인증까지 받았고요.”(남승미 대표)

딱 하나 걸리는 게 관련법의 부재였다. 20㎏ 미만, 4㎥ 이하의 물건은 현행 ‘화물자동차운수사업법’ 상 화물 기준에 들지 않았던 것. 회사 측은 일단 임시허가를 득해 시장에 진출하고자 했다. 정부의 규제샌드박스는 관련 법규가 딱히 없지만 안전성에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임시허가’를 승인 받아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전담기관과 관련 시장의 호응에, ‘선(先)허용 후(後)규제’라는 정부의 규제샌드박스 대원칙을 감안하면 당장이라도 고객들과 만날 것처럼 보였다. 

 

한국형 규제샌드박스 흐름도
한국형 규제샌드박스 흐름도

부지런히 론칭을 준비하던 딜리버리티는 신청 2개월 만에 진행된 심의회의에서 암초를 만났다. 화물연대나 퀵서비스협회 같은 기존 시장의 반발을 맞닥뜨린 것. 그리고 그길로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ICT융합 분야 규제샌드박스 전담기관인 과학기술정통부가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 눈치를, 국토교통부가 기존 산업계의 눈치를 보는 사이 안건 상정 자체가 유야무야 됐다. 그렇게 2년, 그 사이 회사는 반토막이 났다. 규제샌드박스 관련 담당자들이 네 번이나 바뀌는 통에 하소연을 할 대상도 마땅찮다. 경쟁력 있다며 나라에서 자금 지원까지 받았던 스타트업이 규제샌드박스라는 모래늪에 빠져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남승미 대표는 “사업을 키워야 할 2년 동안 인내력만 키운 격”이라며 “여전히 당장 내일이라도 사업 착수가 가능하도록 준비하고 있지만 희망을 품기조차 두려운 게 사실”이라고 끌탕했다. 

딜리버리티 사례는 현행 규제샌드박스 제도의 고질적인 문제를 잘 보여준다. 새로운 시도에 맞춰 기존의 법을 풀어준다는 의도는 이상적이지만, 기존의 산업과 충돌하는 부분은 풀기 어려운 현실의 문제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존재하는 것. 실제로 심의가 지연되거나 교착되는 사례 대부분은 기존 산업이나 부처 간의 이해관계 충돌에서 비롯된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대로라면 (기존 산업과)마찰 없는 분야만 승인되는 반쪽짜리 제도로 남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대두되는 이유다. 

 

규제샌드박스의 심의가 지연되거나 교착되는 건 대부분은 기존 산업 및 부처 간의 이해관계 충돌에서 비롯된다.
규제샌드박스의 심의가 지연되거나 교착되는 건 대부분은 기존 산업 및 부처 간의 이해관계 충돌에서 비롯된다.

| 중재 기능은 부족하고 후속 대책은 부재하고…산적한 과제들 
규제샌드박스는 규제의 잣대가 아닌 시장의 잣대를 통해 평가받겠다는 의도가 명확한 제도다. 그렇다면 스타트업들을 일단 시장에 진출시키려는 의지가 제도의 성패를 가른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문제가 바로 이 대목이다. 스타트업들의 비즈니스 모델이 필연적으로 기존 법이나 산업과 이해관계가 충돌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이를 적극적으로 중재하며 해결책을 모색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정미나 코리아스타트업포럼 정책실장은 “이해관계와 관련해 논란의 여지가 있는 승인 건들을 들여다보면, 담당 부처가 뒷짐을 지는 듯한 스탠스를 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면서 “규제 개혁을 기치로 제도를 만들어놨으면 앞장서서 방법을 찾고 문제에 부딪혀야 하는 게 부처의 역할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법무법인 비트의 송도영 규제샌드박스팀 팀장 역시 “규제샌드박스는 결국 테스트의 개념”이라며 “정부가 보다 전향적인 자세로 스타트업들이 시장에서 테스트를 받아 볼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나 전담기관, 혹은 담당부처가 서로 바통을 넘겨 가며 콘트롤 타워 역할을 외면하는 사이, 스타트업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방치된다. 택시업계와 국토교통부의 눈치게임에 사그라져갔던 승차 공유 스타트업들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모빌리티 분야의 한 스타트업 관계자는 “처음부터 난색을 표했으면 억울함이라도 덜했을 것”이라며 “기다리던 게 아까워 포기하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답답한 속내를 드러냈다.

 

규제샌드박스의 콘트롤 타워 역할이 부재한 사이, 스타트업들은 하염없이 방치된다.
규제샌드박스의 콘트롤 타워 역할이 부재한 사이, 스타트업들은 하염없이 방치된다.

이해관계 충돌로 인한 교착‧지연의 문제와 함께 현장에서 거론되는 또 하나의 문제는 후속 대책이다. 규제샌드박스의 임시허가와 실증특례가 ‘2+2’년의 시한부 정책이고, 초기 승인 기업들의 기한 만료가 도래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관련 부분의 점검과 개선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행 제도에서는 임시허가의 경우, 최대 4년이 지나도 사업을 지속할 수 있지만, 실증특례의 경우 그 사이 관련법이 개정되지 않으면 사업 여부가 불투명하다. 같은 임시허가라도 해도 ICT융합(과학기술정보통신부) 분야는 ‘법령 미정비 시 임시허가 지속’이라는 단서 규정이 없는 등 트랙 간 형평성의 문제도 거론된다. 

생애주기별 전략이 뚜렷한 스타트업에게 이 부분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 시리즈 A~C 등 투자유치의 단계가 구별되는 이유도 각 단계의 마중물 규모와 사업 전략, 활동 범위가 판이하기 때문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시한부라는 꼬리표를 단 스타트업은 신규 제품의 연구‧개발 동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벤처투자를 유치할 가능성도 급격이 낮아진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한국행정연구원 규제연구센터가 지난해 규제샌드박스를 신청한 254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규제샌드박스 제도 이용 불만 요인’을 보면 ‘사전 조건에 따른 사후 영향’(63.3%), ‘종료 후 불안감’(61.1%) 등 후속 대책에 대한 걱정이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다. 

 

규제샌드박스 제도 이용 불만 요인
규제샌드박스 제도 이용 불만 요인

이밖에도 소수정예로 활동하는 초기 스타트업들을 대상으로 하는 제도이니 만큼, 너무 복잡한 절차나 방대한 서류 등을 간소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현재 4~5개 부처로 흩어져 있는 운영조직도 일정을 지연시키고 진행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운 원인으로 지적됐다. ICT융합 분야의 경우 정보통신산업진흥원,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대한상공회의소, 신기술‧서비스심의위원회 등으로 접수‧심의가 기구가 쪼개져있는 데 이를 일원화‧정례화 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실제 규제샌드박스를 신청한 경험이 있다는 모 스타트업의 대표는 “신청을 받는 담당자가 우리 업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다소 보수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느낌이 들었다”면서 “그러다보니 사소한 피드백도 번번이 지연되는 등 전체적인 일정이 늘어지는 경향이 있었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전담 인력을 통한 실무조직 구축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지금 같이 임시조직 형태로 운영하는 것은 결국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정미나 정책실장은 “결제 받는 기관을 한 곳씩만 줄여 나가도 스타트업들이 느끼는 속도는 훨씬 빨라질 것”이라며 “이를 위해 각 부처마다 전담 인력 혹은 전담 팀을 만들고 충분한 권한도 부여되어야 한다”고 했다. 송도영 규제샌드박스팀 팀장은 “정부는 전담 인력으로 구성된 실무조직을 구축하고, 신청자는 승인을 위한 사전 준비를 충실히 하며, 해당 주무부처는 규제개혁을 위해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한다”면서 “그 3가지가 맞물려 돌아가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든 규제샌드박스를 둘러싼 불만들이 터져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필자소개
최태욱

눈이 보면, 마음이 동하고, 몸이 움직이는 액션 저널리즘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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