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커가 될 수 없다면, 페이커를 키우겠노라”
“페이커가 될 수 없다면, 페이커를 키우겠노라”
2019.04.23 16:00 by 최태욱

확고한 미션은 스타트업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미션人파서블'은 미션 완수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창업가들을 만나보는 시리즈입니다.

꼬꼬마시절, 밤이 새는 줄 모르고 게임 삼매경에 빠져있던 필자에게 엄마는 혀를 차며 말했다. “그렇게 게임만 해서 나중에 뭐가 될래….” 당시엔 서둘러 사태를 수습하고 이불 속으로 숨어드는 방법뿐이었지만, 요즘 같으면 당당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프로게이머 할 거거든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무렵, 게임을 ‘e스포츠’라 부르고, 게이머를 당당히 선수로 칭했다. ‘프로게이머’란 직업이 회자되기 시작한 것. 레전드 게임 ‘스타크래프트’로부터 시작된 이 바람은 강풍이 되어 청소년들을 유혹했다. 게임만 잘 하면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이라니… ‘리그 오브 레전드(LoL)’의 황제로 불리는 이상혁(페이커) 선수 연봉이 30억원을 상회한다는 걸 생각하면, ‘직업’이란 표현조차 소박해 뵌다. 전국의 ‘게임 좀 한다’는 친구들이 로얄로더(프로게이머가 처음 진출한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을 일컫는 e스포츠 용어)를 꿈꾸며 몸을 내던진 이유다. 오늘 소개할 홍승표(33) GGWP 대표도 그 ‘게임 좀 한다’는 친구 중 하나였다.

 

게임 좀 하던 남자, 홍승표(사진) GGWP 대표
게임 좀 하던 남자, 홍승표(사진) GGWP 대표

| 눈물 젖은 빵을 씹으며 미션을 완성시키다

어릴 적부터 게임 마니아였던 홍승표 대표는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프로게이머(‘서든어택’ 종목)를 준비했다. 당시 19살, 대학에 갓 들어왔을 때였다. 

“프로가 되기 위해선 대회 수상 경력 같은 걸 많이 쌓으면서 이름을 알려야 해요. 프로팀 공개모집이 있기는 하지만 워낙 바늘구멍인데다가 자주 열리지도 않죠. 그보다는 ‘잘한다’고 소문난 애들을 섭외하는 식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더 많아요.”(홍승표 대표)

당시 충남 논산에서 지내던 홍 대표는 전국 각지를 돌며 대회에 참여했다. 소위 ‘PC방 대회’라 불리던 것들인데 역시 서울에서 가장 많이 열렸다. 아르바이트하고, 연습하고, 대회 나가는 식의 단조로운 삶이 이어졌다. 힘들 때마다 프로 무대에 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마우스를 움켜쥐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품었던 ‘희망’이란 두 글자 뒤에 ‘고문’이 붙어 있었다는 걸 말이다.

홍 대표는 “내가 경험한 아마추어 게이머의 세계는 그야말로 무법천지였다”고 했다. 어렵사리 연습해서 우승을 해도 상금을 떼어 먹는 게 다반사였고, ‘프로로 키워주겠다’며 데리고 들어가서 잡무(雜務)만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함께 게임하던 친구들을 통해서 불법‧부당 계약에 대한 소문도 자주 들었다. 

“프로게이머 지망생들은 굉장히 어려요. 고등학생이거나, 갓 졸업한 친구들이 대부분이죠. 법‧제도에 대한 지식은커녕, 사회경험도 없다보니 쉽게 이용도 당하고, 사기도 당하고 그러는 거죠.”(홍승표 대표)

프로게이머 출신 방송인 홍진호씨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프로게이머를 할 생각이라면 모든 것을 확실히 올인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모든 것을 걸고 도전한 친구들이 상처받고, 좌절하는 일들이 현실에선 너무 쉽게 일어났다. 게임 실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로 말이다. 

 

화려한 프로게임 산업의 이면에는 아직 정돈되지 못한 생태계에서 허우적거리는 아마추어 게이머의 눈물이 있었다.(사진:Roman Kosolapov/Shutterstock.com)
화려한 프로게임 산업의 이면에는 아직 정돈되지 못한 생태계에서 허우적거리는 아마추어 게이머의 눈물이 있었다(사진:Roman Kosolapov/Shutterstock.com)

홍승표 대표의 3년은 그렇게 허공 속으로 흩뿌려졌다. 퍼뜩 정신을 차린 그는 부랴부랴 취업 준비를 하고, 취직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평범한 삶으로 궤도를 수정했다. 직장생활은 안정적이고 나름 재미도 있었지만, 가시지 않는 어떤 울분 같은 게 있었다. 

‘진짜 열심히 했는데… 진짜 잘했는데… 실력 말고 다른 게 더 중요하다면 잘못된 거 아닌가? 결국 프로의 근간은 아마추어인데 이럼 정말 안 되는 거 아닌가?’

결국 떨쳐낼 수 없는 울분이었다. 울분은 의지가 됐고, 행동을 이끌었다. ‘내가 바꿔 보리라’며 분연히 나설 것을 결심했다. 스타트업 ‘GGWP’의 미션이 선포된 순간이었다.(GGWP는 ‘Good Game, Well Played’의 약어로 게임을 마치고 상대에게 하는 인사다.)

 

Mission Statement

“아마추어 게이머들이 꿈을 위해 건강하게 노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

앞만 보고 달려, 뒤에 우리가 있으니까
앞만 보고 달려, 뒤에 우리가 있으니까

|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빠져나갔다. 돈과 열정이… 

2017년 8월 사업자 등록을 마친 GGWP의 첫 번째 비즈니스 모델은 온라인 플랫폼이었다. 당시 가장 핫한 게임인 ‘배틀그라운드’ 종목의 게이머들을 위한 ‘스쿼드밸리(squad vally)’가 그것. 

혼자선 약자일 수밖에 없는 아마추어 게이머들이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정보도 나누고, 팀도 만들기를 바라며 구축한 사이트.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주고 싶은 욕심에 신용보증기금의 대출까지 받아가며 완성도를 높였다. 홍 대표는 “온라인 게임은 대부분 팀 게임이라 팀 빌딩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팀원 구하기가 쉽지 않은 아마추어들이 모여서 활발하게 교류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원대한 구상이었지만 현실에선 무기력했다. 3개월 간 접속한 사람 수가 200명도 채 되지 못했다. 사람이 모이지 않는 플랫폼은 그저 황량한 사이버 공간에 불과하다. 홍 대표는 “사이트의 핵심정보라고 생각했던 프로게이머들의 게임 데이터나 전적 정보를 가져오는 게 불발되면서 유저들이 흥미가 급격히 떨어졌다”고 말했다. 

큰 투자가 들어갔던 핵심 비즈니스가 제 기능을 못하자 모든 게 혼란해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 보금자리가 돼 주었던 모 창업지원기관 인큐베이션 센터에서도 나와야 하는 상황. 쫓기듯 모 지자체 내 3평짜리 소호사무실을 얻어 재정비를 꾀했지만, 이렇다 할 동력이 없었다. 

일단 플랫폼의 실패를 인정하는 게 급선무였다. 투입된 자원에 연연하지 말고 새 길을 뚫어야했다. 그때부터 약 반 년 간 ‘묻지마 기획’이 이어졌다. 아마추어 게이머 활성화를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기획하고 제안서로 만들었다. 딱히 받아줄 곳도 없는데 말이다. e스포츠 아카데미, e스포츠 투어, 대학 협력 프로그램, 아마추어 게임 대회 등에 대한 운영 계획서를 만들어서 투자자나 지자체를 찾아 다녔다.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이었죠. 플랫폼으론 안되는 게 확실한데,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어떤 곳도 우리 기획과 제안에 관심을 갖지 않았어요.”(홍승표 대표)

그 사이 자본금과 대출금은 야금야금 잠식되고 있었다. 회사 씀씀이를 아무리 줄여도 한계가 있었다. 수업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샌가 상황을 눈치 챈 가족과 친구들도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다시 직장 들어가라”고 종용했다. 사실 그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버티고 싶어도 버틸 수가 없는 상황이 조금씩 숨통을 조여 오고 있었다. 홍 대표는 “스타트업하면서 ‘버티라’는 조언을 참 많이 들었는데, 이게 얼마나 현실적인 조언이었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고 했다.

 

홍승표 대표의 심경이 고스란히 담긴 페이스북 메시지들. ‘그래도 포기는 안 한다’에서 ‘회사 접히기 일보직전’까지 이르는데 고작 두 달 여가 걸렸다
홍승표 대표의 심경이 고스란히 담긴 페이스북 메시지들. ‘그래도 포기는 안 한다’에서 ‘회사 접히기 일보직전’까지 이르는데 고작 두 달 여가 걸렸다

| ‘그래도 미션, 결국 미션’이 만든 반전의 서막 

“잔고를 계산해보니 딱 한 달 정도 직원 급여를 더 줄 수 있더라고요. 그래서 D-Day를 10월 25일로 맞춰놓고 폐업 준비를 했죠.” 

자신이 겪은 일을, 다른 어린 친구들이 겪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닻을 올린 GGWP는 그렇게 1년 2개월 만에 좌초위기를 맞았다. 함께 밤샘 제안서 작업을 하던 동료들을 퇴사처리하고, 다시 혼자가 됐다. 

본격적인 회사 정리 작업에 들어서던 2018년 11월 초, 뜻하지 않게 투자 관련 미팅이 이뤄졌다. 스타트업 지원기관에서 만났던 지인의 소개였다. 하지만 홍 대표는 별로 내키지 않았다. 1년 넘게 수많은 투자 미팅을 했지만, 늘 수익과 손익분기점 부분에서 막혀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제는 팀원도 없고, 의지 또한 많이 꺾인 상태. 하지만 “문화 콘텐츠에 대해 관심이 굉장히 많은 분”이라며 거듭 권하는 지인의 호의마저 꺾을 순 없었다. 

미팅 분위기는 단출했다. 큰 기대가 없었던 홍승표 대표는 그저 자신이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떤 문제를 봤으며, 이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었는지 담담하게 풀어냈다. 

“이상했어요. 제가 자신 없는 돈 얘기는 거의 안 묻고, 자신 있는 미션과 가치에 대해서 많이 묻더라고요. 궁합이 맞는 투자자라는 느낌이 왔죠. 게임 산업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문화 콘텐츠로서의 잠재적 가치를 크게 보고 있는 것 같았어요.”(홍승표 대표)

그리고 2주후 “투자를 하기로 결정했다”는 낭보가 날아들었다. 1년 2개월 간 아무리 노력해도 이뤄지지 않았던 게, 단 2주 만에 성사된 것. 하지만 이는 우연의 결과가 아니다. 오랜 경험과 폭넓은 연구조사로 단단해진 대표자의 미션과 GGWP가 진행한 일련의 활동을 통해 확보한 게임 업계의 인적 네트워크는 투자자에게 분명 매력적인 요소다. 

 

GGWP의 회의 모습, 투자 유치 이후에 식구가 제법 늘었다
GGWP의 회의 모습, 투자 유치 이후에 식구가 제법 늘었다

| 진짜 재미있는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마중물로 운신의 폭이 넓어졌지만, GGWP의 행로는 오히려 더 간명해졌다. 플랫폼이나 아카데미 같이 ‘있어 보이는’ 것을 궁리하는 대신, 미션을 위해 직진으로 달리는 것을 택했다. 직접 아마추어 게임단을 운영하고, 아마추어 대회를 여는 것이다. 

현재 GGWP는 4명의 촉망받는 아마추어 게이머를 관리하고 있다. 선수부터 감독‧코치까지 모두 회사에서 월급을 준다. 신원택 GGWP 마케팅 매니저는 “원래 2부(아마추어) 리그 선수들은 월급이 아예 없지만, 우린 ‘너희도 프로만큼 가치가 있는 자원이다’라는 인식을 만들 목적으로 프로처럼 월급을 주고, 숙소나 연습실도 프로처럼 꾸며줬다”고 설명했다. 선수들과 함께 2부 리그(배틀그라운드)에 꾸준히 참여하고 이들을 프로 무대에 올려주는 것까지가 GGWP의 역할이다. 이 과정에서 회사가 기대할 수 있는 수익은 네이밍 스폰서나 트레이드 머니인데, 모두 선수가 두각을 나타내야 가능한 것이니 어찌 보면 좋은 대우를 해주는 것이 지당하다. 

 

GGWP가 운영하는 아마추어 게임단 ‘아수라워크’ 선수들의 프로필 사진과 일상 모습
GGWP가 운영하는 아마추어 게임단 ‘아수라워크’ 선수들의 프로필 사진과 일상 모습

아마추어 온라인 대회(GGWP play league)를 주관하는 것도 중요한 활동 중에 하나다. 지난해 12월에 첫 시즌을 시작해 벌써 4번째 시즌을 치렀다. 아마추어를 대상으로 하지만, 원하는 프로팀도 참가가 가능한 일종의 ‘프로암’ 대회다. 배틀그라운드 종목 쪽에선 꽤 인지도를 높여가고 있어, 이 분야 역시 기업들의 스폰서를 기대할 만 하다. 홍승표 대표는 “규모가 있는 기업 중에 게임리그를 운영하고 싶어 하는 곳들이 꽤 있다”고 귀띔했다. 선수 육성이나 대회 유치 등의 과정을 영상으로 제작해 브이로그나 유튜브를 통해 홍보하기도 한다. 

홍승표 대표와 GGWP는 지난 2년간 ‘빚’으로 만든 징검다리를 하나하나 건너가며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 무언가를 시작해볼 수 있겠다는 기반과 자신감은 마련했다. GGWP가 운영했던 스크림(scrimmage‧연습경기) 채널과 각종 대회를 통해 연을 맺은 선수들이 3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들은 모두 회사의 의미 있는 자산이다. GGWP가 제시한 이례적인 혜택에 덜컥 의심부터 하던 아마추어 게이머들이 진정성을 인지하기 시작했고, 이는 배틀그라운드 종목 전체로 확산되고 있다. 최근에는 입단 문의를 하는 아마추어 게이머들도 부쩍 늘었다. 홍 대표가 말한 ‘무언가를 시작해볼 수 있는 기반’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는 단단한 미션과 치열한 현장이 만난 결과다. 

 

/사진: GGWP

 

필자소개
최태욱

눈이 보면, 마음이 동하고, 몸이 움직이는 액션 저널리즘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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