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은 포장 아닌 아이덴티티, '전방위 디자이너' 박원철
디자인은 포장 아닌 아이덴티티, '전방위 디자이너' 박원철
2015.12.20 07:02 by 구승준

크리에이티브는 어디에서 폭발하고, 어떻게 숙성 또는 변형되며, 어떻게 완성되는가? ‘크리에이티브’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가장 빤한 이미지는 대뇌 ‘생각의 전구’에 불이 번쩍 하고 들어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크리에이티브를 이루는 일련의 과정 가운데 아주 작은 요소다. 크리에이티브를 현실화하는 데는, 상대성원리를 발견하기까지의 기간보다 그것을 대중에게 설명할 방법을 고민한 기간이 더 길었다는 아인슈타인의 고백과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여기서는 그 얘기를 듣는다. 그들의 공상가적인 열정과 만년대리 같은 성실성, 아이디어를 세일즈 하는 마케터 같은 수완까지 크리에이티브의 모든 것.

 

 

그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그의 디자인 영역을 정의할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해 한참 고민했다. 공업 디자인을 출발점으로, 박원철 디자이너의 디자인 영역은 한시도 쉬지 않고 확장을 거듭하고 있다. 편집 디자인, 드로잉 작업, 애니메이션, 제품 디자인, 인테리어 디자인, 설치 미술 등등 그의 작업 영역은 전방위적이다. 내일 당장 “지금은 건축 디자인을 하고 있어요.”라는 전화를 받아도 놀랄 것 같지 않다. 물론 거기엔 먹고살기 위해서라는 심플한 이유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절반의 이유다. 나머지 절반은 그가 ‘진짜배기 디자이너’이며, 거기서 파생된 필연적인 결과로서, ‘디자인’은 그가 숨 쉬고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라는 데서 찾아야 옳다. 말하자면, 박원철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세계는 그의 디자인 철학에 의해 재창조된다. 하지만 그의 작업이 예술가적인 즉흥성과 자유로운 영감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안정된 대기업 고액 연봉자의 삶을 마다하고 뛰쳐나온 후, 그는 ‘내면의 예술가’와 ‘두 아이의 아빠’라는 가장으로서의 무게를 조화시키는 숙제와 계속해서 씨름하고 있다. 거기에도 절제와 균형의 황금분할이 따른다. 그것도 디자인이다.

 

2009 함평나비축제 "ART COW" 전시회 중 '소나비꿈'_ 센서를 이용한 인터랙티브 아트.   "꿈을 꾼다. 나비들이 소를 들어올린다. 소가 나비와 함께 하늘을 난다. 관람객들이 소 앞에 서면 소 위의 나비들이 춤추듯이 흔들거리면서 돈다."
'인간관계'_점과 점이연결되고 이것이 선이 되어 서로 연결된다. 사람의 관계가 고립되거나 확장되어가는 이야기

 한국에서 ‘필립 스탁’이 나오지 않는 이유

어릴 때 꿈은?

박원철(이하 박) : 뭔가를 만드는 일을 좋아했다. 재미있는 걸 보면 찰흙, 박스나 마분지로 만들어보곤 했다. 거북선 같은 걸 만들었던 기억도 난다. 막연히 크면 ‘엔지니어’ 같은 걸 하게 될 줄 알았다.

왜 공대가 아니고 미대를 갔나?

박: 뭔가를 만들 수 있되 창조적으로 만들 수 있는 곳을 찾았는데, 그게 공업디자인이었다. 고3때 초기 때 진학 상담을 하다가 결정했다. 초・중・고 시절 계속 그림을 그려 1년만 준비해도 미대에 갈 수 있었다.

대학에 가니 창조적으로 만들 수 있던가?

박 : 대학 공부에서 좋았던 점은 동료들과 함께 생각하고 다양한 디자인 실험을 해 볼 수 있었던 점이다.  당시 교육은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방법론이 일반적이었는데 나는 그런 것들을 잘하지도 못 했고, 좋아하지도 않았다.  우리나라 공업디자인은 시장조사를 통해 컨셉트를 도출하고 기능성을 결합하는 방법을 적용하는데, 그것은 마케팅의 보조 수단이지 크리에이티브와는 거리가 멀다. 디자인을 먼저 생각하고 그게 기능과 합치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나는 더 즉홍적이고 자유로운 상상을 펼치고 싶었다. 한국에서 필립 스탁(Philippe Starck) 같은 디자이너가 나오기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컨셉트 아트와 회화 작업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Philippe Starck, designer |

프랑스 태생(1949년)의 산업 디자이너. 유머러스함을 고급화시키는 독특한 표현력으로 현존하는 제품 디자이너 중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로 꼽힌다. 가구‧건축‧인테리어‧생활소품‧운송수단 등 수많은 분야에서 디자인 트렌드를 견인해왔다. 대표작으로는 뉴욕 파라마운트 호텔 디자인(1988), 유로스타 기차 디자인(2003) 등이 있다.

 

 

2014 "착한 아티스트들의 착한 가방 전시회" / 서울대학병원 '욕심' : 가라앉는지도 모르면서 컨테이너를 잔뜩 싣고 가는 배.

그래서 애니메이션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것인가?

박 : 재학 시절에 소소한 공모전에서 수상도 했지만 이대로 필드에 나가는 건 허무했다. 자동차 디자인을 예로 들어보자. 재규어라는 자동차는 재규어가 웅크려있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엔진 마력이나 출력도 그에 맞춘 ‘머슬카’다. 이런 차가 우리나라에서 나올 수 있을까. 임원진이 보고 “헤드라이트는 멋있는데 그릴은 별로네. 패널은 이런 분위기로 갑시다.”라는 식으로 결정되는 게 우리나라 실정이다. 그래서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공업디자인을 포기하고, 컨셉트디자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컨셉트디자인이란 게임이나 영화의 뼈대그림을 잡아 나가는 일이다.

한국 디자인업계의 문제점은?

박: 디자인은 총체적이며 일관된 크리에이티브로서, 기획 단계부터 끝까지 컨셉트가 일관성 있게 적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클라이언트들은 디자인을 예쁘게 꾸며주는 장식 정도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디자이너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디자인 업계의 관행도 문제다. 디자이너들은 1년에 3만 명씩 배출되는데 법적 보호 장치가 미흡하다. 계약서를 제대로 쓰고 일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현실이 이러니 우리나라에는 나이 많은 디자이너들이 거의 없고, 나이가 들면 대부분 현직을 떠나 관리직로 변하는 게 현실이다.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디자이너로 자긍심을 가지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창작은 ‘꿈’이라기보다는 ‘습관’이다, 못하면 고통스럽다 

애니메이션 작업은 만족스러웠나?

박: 애니메이션은 ‘그나마 나은’ 대안이었다. 컨셉트디자인은 내가 상상하는 대로 그리는 일이라 일반 기업에서 공업디자인을 하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최선은 아니었다. 계획을 짜고 그것에 따라 밑그림을 그리고 채색하는 일은 나에게 맞지 않았다. 8년 동안 그 업계에 있다가 염증을 느낄 무렵, 마침 한 대기업에서 우리나라에서 한 적이 없는 신규 프로젝트를 한다고 해서 합류했다.

대기업이 맞을 리가 없지 않은가?

박 : 그렇다. 하지만 프로젝트 자체가 워낙 신선하고 실험적이었다. (어떤 것이었는지 공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기업에는 파벌문화가 있었고,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서 프로젝트가 생각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퇴사를 결심할 무렵 윗분들이 회사에 남아달라고 했다.  계속 다녔다면 꽤 높은 연봉에 생활은 보장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기업 문화에 염증을 느끼고 퇴사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어떻게 먹고 살았나?

박 : 프리랜서로 디자인 일을 했다. 편집디자인, 드로잉작업, 애니메이션, 제품 디자인 작업 등 일이 들어오는 대로 했다. 그런데 직장에 다니면서 돈을 벌 때마다 수입이 적어도 행복했다.

그러나 생활고 때문에 꿈을 포기하는 사람이 많다.

박 : 창작은 내게 ‘꿈’이라기보다는 ‘습관’이다. 평생 내 마음대로 상상하고 끼적이는 게 습관이 되어 그걸 못 하면 고통스럽다. 늘 음악을 듣던 사람에게 그걸 못 듣게 하거나, 아침잠이 많은 사람에게 평생 새벽에 일어나라고 하면 얼마나 괴롭겠는가? 나는 출퇴근하는 직장에 다니지 않게 되자 행복하다고 느꼈다.

출퇴근을 싫어하는 건 게을러서 그런 게 아닌가?

박 : 게을러서 그런 게 아니다. 한번 작업을 시작하면 여러 시간이나 심지어는 며칠 동안 몰입한다. 다만 내 시간을 가지고, 내 페이스대로, 내 작업을 하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 ‘꽂혀있는’ 작업은 시계… 아날로그적인 감성 녹이고 싶다 

uncle'joe' _ 번지기 기법을 자주 사용한다.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그림이 그려지는 과정을 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후로는 어떤 작업을 했나?

박 : 딱히 정의하기 어렵다. 현대미술은 상업미술과 순수미술의 구분도 없고, 장르의 구분도 없다. 내 작업도 그렇다. 드로잉이나 그림을 전시하기도 했고, 설치미술이나 오브제를 만들기도 했다. 드론에서 조명을 쏘는 일종의 행위미술을 하기도 했다. 드론에 LED를 달아서 하는 드론 퍼포먼스였다.  올해 초에는 상하이에 있는 '서울 3D뮤지엄'에서 전시기획 작업도 했다.

최근에 ‘꽂혀있는’ 작업은?

박 : 최근에는 시계 디자인에 몰두하고 있다. 먼저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싶은 점이 있다. 디자인은 카피가 심해 제품이 출시되기 전에 실물디자인을 공개하기가 어렵다. 그밖에도 벽이나 유리에 물체를 고정시키면서 장식적 효과나 교육적 효과를 낼 수 있는 고정구. 아이들의 교육을 위한 완구 등을 작업하고 있다.

 

 

왜 시계 디자인을 하는가?

박 : 고등학교 때 학교에 가지 않은 적이 있다. 일부러 안 간 게 아니라, 새벽까지 그림을 그리다가 깜빡 잠들었다가 일어나니 퇴교 시간이 다 되어가는 초저녁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정확히 짜여진 시간에 맞춰 사는 게 힘들었고,  요즘도 시간에 얽매이는 게 싫다. 특히 시계를 보며 일을 하는 강박관념을 갖는 게 싫다. 특히, 한국에서는 “지금 몇 시 몇 분이냐?”라고 말하지 않고 “지금 몇 시쯤이야?”라고 묻는다. 이런 우리식 아날로그의 감성을 시계에 녹여 서정적으로 구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 작업할 때 가장 큰 어려움은 뭔가?

박 : 주로 컨셉트디자인 일을 해왔기 때문인지 나는 아이디어만 많은 편이다. 내 브랜드 제품들을 계획 중인데, 생각지도 못했던 할 일이 상당히 많다. 상품 개발은 익히 아는 영역이지만, 제조와 유통라인을 만들어 나아가야 하는데 고민이 많다.

 

 

 

 

2014 Roadshow North-East India 프로젝트 중. 인도 실롱의 한동네 언덕에서 펼친 드론퍼포먼스와 로드쇼 (사진 김도균 사진작가 촬영)

영감의 원천은 무엇인가, 어디에서 영감을 받는가?

박: 조용한 곳에서 조용하게 보내면 영감이 떠오른다. 가끔 꿈에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아이들이 태어난 뒤로는 아이들이 만들거나 그리는 것을 보고 많이 배운다.

 

 

wonpark

박원철 | 국민대학교 공업디자인학과 졸업.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콘텐츠 디자인 전공. / 2001 아시아기초조형학회 국제교류작품 전시 (단체전), 2010 'Elan Vital Project' / BlACK SPACE Galley, West 25th Street, New York (단체전) 2011 '한국현대미술전' / 세계일보창간 22주년 기념전 (단체전) 외 다수 전시 / 1997년 동서 세라믹 공모전 특선, 2001년 후쿠오카 Asia Digital Award 우수상 작품명:'THIRSTY' 외 다수 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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